경제공동체

<비혼세>를 듣다가

by 시은

요새 주 2회는 듣고 있는 팟캐스트가 있다. [본격 비혼라이프 가시화 방송]이라는 부제가 달린 해방촌 힙스터 비혼세 님이 하는 방송이다.


사실 나는 결혼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거라기보다 결혼 생활은 끝없는 돈 문제 해결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돈 문제를 해결할 만큼 벌지는 못 할 것 같아 돈 때문에 결혼 못 해서 비혼이긴 한데 공감 지점이 많아 계속 들을 것 같다. 아니, 사실 공감이고 뭐고 엄청 재미있다. 웃겨 미쳐버릴 것 같다. 다행히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플 때쯤 방송이 끝난다.


뭐, 하여튼. 오늘은 문득 취미가 아주 많은 리치 언니 에피소드가 방송을 들었다. 그 언니는 그저 취미만 많은 게 아니라, 그중에 몇 개는 좀 잘하는 것 같다. 돈 많이 드는 취미생활을 계속하며 살 수 있는 이유에는 아무래도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있지 않겠느냐는 비혼세의 질문에, 리치 언니가 덤덤하게 말했다.


-아뇨, 전 뭐 한 달 용돈 30만 원으로 살라고 하면 또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물욕이 별로 없어서...


그래도 어쨌든 결혼을 하고 ‘경제공동체’가 생기면 취미 생활이 지금보다는 어렵지 않겠느냐... 이런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는데 이 ‘경제 공동체’라는 단어 덕분에, 물론 못 하는 것에 더 가깝지만 내가 왜 결혼을 하고 싶지 않은지 더욱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결혼이라는 게, 사랑하는 두 사람의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는 걸 30대 초반 이상의 사회인 90%는 깨닫는다.


똑똑한 사회인이거나 똑똑한 학생들은 그 나이 되기 전에 일찌감치 눈치채기도 하는 것 같지만 나는 겨우 평균 정도의 인간이라 30대 초반에 간신히 깨달았다.


결혼은 공동체 구축의 첫 발자국이다. 결혼 이후에는 살림 공동체가 되고, 경제 공동체가 되고, 아기라도 낳는 날이면 육아 공동체가 된다. 수많은 부분을 공유하기 싫어도 공유하게 되고, 매 상황의 크고 작은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서로의 돈과 노동력, 시간을 합쳐야 하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게 두려운 거다. 지금 남자 친구가 꽤 만족스럽고 오래오래 이 사람과 행복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결혼은 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거라는 걸 오늘에야 깨달았다.


결혼을 하게 되면 모든 문제를 공유해야 할 것이며, 모든 문제 해결에는 당연히 돈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고, 내 얇은 월급으로 그런 각종 문제을 잘 해결하며 평온하게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무의식이 내 심연에 빙산처럼 존재했던 것이다.


100% 확신할 수 있다. 나는 딱 1인분의 삶, 나 하나 먹여 살리는 정도만 가능하다. 내 그릇이 딱 그만큼만 가능하다. 마음이나 지갑이나.


몇 년 전, 엄마가 동생이 사고 친 것 같다며 500만 원만 줄 수 있겠냐고 했다. 구체적인 이유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럴 돈도 없었지만 그걸 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독립 이후 집에 손 한 번 안 벌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겨우 돈 달라는 얘기라니. 심지어 미안해하시거나 민망해하시지도 않았다. 빌려주면 언제 주겠다는 말씀도 없었다. 집에 손 안 벌리고 잘 살고 있다는 칭찬까지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녀지만 장녀라는 이유로 받은 특혜가 없는데 굳이 장녀 노릇할 생각은 없다.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워야 하는 법. 나는 엄마에게 내 문제 이상의 스케일을 해결할 능력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내가 일으킨 문제가 아니면 내가 해결하고 싶지 않다. 당연히 나는 엄마로부터 매몰찬 년이 되었다. 아마 해결해드렸다고 해도 그건 당연한 것처럼 여겼을 것이다.


결혼 이후 경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면, 돈 문제에 대해 숨기지 않고 얘기해야 한다는 것, 나는 그게 많이 두렵다. 물론 그 밑바닥에는 나의 해결 능력이 크지 않다는 사실도 있지만, 가진 돈이 적어서 부끄럽다거나 혹은 훗날 돈이 많아져서 내 돈이 아까울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문제를 내 문제처럼 여기고 그래서 너와 나의 돈이 아니라, ‘우리의 돈을 우리라는 이름으로’ 조율해가며 일상을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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