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꽃길

트라우마

by 시은

이별 영화 이야기를 쓰다 보니 내가 한 이별 중에 가장 쓰린 기억은 어떤 이별이었는지 생각해봤다.


별 대단할 거 없는 연애였지만, 최선을 다 했기 때문에 비록 내 인생에 흑역사를 선물하고 이불킥을 할 연애가 되버린 경험들도 있지만 후회는 없다. 그 모든 연애를 돌이켜 봤을 때 헤어져서 안타깝다거나 미안하다거나 아쉬움이 남는 연애가 없다.


좁힐 수 없는 서로의 의견 차이로 내가 헤어짐을 말하거나, 혹은 상대방이 피도 눈물도 없이 차버리고 연락조차 되지 않는 잠수이별을 당한 크리스마스 시즌 강남역 스타벅스,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아는 동생을 붙잡고 울고불고 난리친 연애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다 무덤덤하다.


심지어 내가 울었던 적이 많은 것도 아닌데 저 스타벅스 사건 당시 누구 때문에 울었던 건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헤어지고, 얼마 안 되어 만나고 헤어지고, 또 그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만나고 헤어진 순간들도 있었다.

남자친구와 한 연애 때문에 한 이별 말고, 친구와의 쓰라린 절교가 생각난다.


이 친구와의 헤어짐은 절교를 선언할 당시도,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이 정도로 감정이 오래 갈 줄 몰랐다.

절교하면 그 친구에 대한 감정이 정리될 줄 알았다. 아니 생각이라도 덜 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눈물나지는 않지만, 감정이 설명할 수 없이 착잡해진다.


아주 오래전, 어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의 일이었다. 그 남자친구가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이 친구에게 울면서 나와 다시 잘 되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친구는 그가 보인 눈물들을 나에게 언급하며 다시 잘 해보면 안 되겠느냐고, 너무 안쓰럽더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잘 할 생각이 없는 상대였다. 내 삶의 가치관과 그의 가치관을 비교해봤을 때 서로 도저히 맞춰지지 않는 그런 몇몇 지점이 있었고 그 다름을 노력하려고 하기보다 상처가 되는 험한 말들로 비난한 남자친구였다.


나는 그가 가진 나쁜 성격의 민낯을 수없이 발견했고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헤어진 것이었다. 되돌아갈 생각은 없었지만 그의 민낯을 친구에게 까발려서 그를 욕하기는 싫었다.


아니, 사실은 내가 별로인 사람을 만났다는 게 부끄러웠던 게 더 컸던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민낯을 알게 되면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그를 만났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남들 앞에서만큼은 잘 해주는 연애를 하는, 자신이 좋은 사람인 것을 보여주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는데, 밖에서 보면 내가 온갖 예쁨을 다 받는 여자친구처럼 보였다.


둘이 있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지쳐서 헤어졌다고는 해도 내가 별로인 남자를 만났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음과 뒷담화를 하기 싫었던 마음이 반반이었다. 어쨌거나 친구들의 기억 속에 그게 진짜 내 모습은 아닐지라도 그런 달달한 연애를 했던 내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랐다.


그게 문제였다. 내 친구의 기억 속에 그 남자친구는 나에게 다정한 남자친구였고, 실수를 했다 치더라도 내가 순간적으로 욱 해서 싸운 것이지 그렇게 잘하던 남자친군데, 설마 헤어진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단호하고, 그 남자친구는 절박하니 아마 내가 못돼 보였을 것이다. 차가워 보였을 것이다.


우연히 그가 내 친구에게 연락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내가 왜 그와 연락하는지 묻자, 길게 연락하지 않을 거라고, 너무 불쌍해서 전화 몇 번 받아준 거라고 했다. 너는 헤어지고도 괜찮은데, 그 남자친구는 너와 달리 그렇지가 않더라고 너무 불쌍하더라고,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던데 헤어졌더라도 지인으로서 위로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나는 차갑게 그는 결코 괜찮은 사람이 아니며, 두번 다시 그의 연락을 받거나 그와 내 얘기를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고, 그녀는 나에게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거절할 수 없어서 나 몰래 계속해서 그의 연락을 받아주고, 때로는 만나서 술을 마셔주며 그의 이별 넋두리를 들어주었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는, 물론 그 친구가 말해준 게 내가 알고 있는 전부지만, 자신과 그가 바람을 피운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이 넋두리를 그만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미 생각보다 물을 많이 엎지른 뒤였다.


그녀는 내가 그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의 연애 흑역사 몇 조각을 알고 있었는데, 크게 창피할 건 없지만, 아주 가깝지 않은 이상, 남들이 알기를 바라지는 않는, 지극히 내 프라이버시에 해당하는 그때의 내 모습들을 슬픔의 늪에 빠져 있는 그에게 말해주며, 다시 좋은 사람 만날 거라고 위로를 해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남자친구와 함께.

가끔 자신의 남자친구가 너무 일이 늦게 마치면, 둘이 볼 때도 있었지만 절대 이성으로서의 분위기는 없다는 게 그 친구의 부연설명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전 남자친구가 그 에피소드들을 언급하며 나에 대한 분노와 비난과 욕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셋이 아닌 둘만 보면 안 되겠냐고 강요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얘기를 들어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는 게 친구가 내 전 남자친구와 연락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판단한 계기였다고 한다.


그 얘기를 그녀가 나에게 털어놓은 것은, 내가 서울로 올라가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점점 서로 얼굴 보기 힘들어질 거라고 생각한 그녀가 그 비밀을 품고 있기가 불편해서였는지 내가 알아야 하는 전 남자친구의 실체가 있다며 그 얘기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난 그때 그걸 듣고도 놀라지 않았으며 분노할 여유도 없었다. 어차피 안 좋은 마음이 쌓이고 쌓여 헤어진 친구라서 새로운 나쁜 모습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거기서 더 실망할 것도 없고, 그 이유가 아니라도 두 번 다시 만날 생각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서울에 올라가서 들 생활비 걱정 때문에 다른 데 쓸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고시원 월세 2-3달치와 근근이 살아갈 생활비 정도를 들고 서울에 올라가는 것이었으니 돈 걱정 외에는, 어서 빨리 완성해야 하는 시나리오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도 정신없이 보내느라 그 일이 떠오른 적이 없었다. 한동안은. 하지만 급한 생계적 문제를 해결하느라 도저히 신경을 쓸 수가 없었을 뿐, 나도 모르게 사실은 그녀가 그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마음속 한구석에 많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서울 온지 1년 반쯤 지났을 무렵, 경제적으로 안정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생활패턴은 자리가 잡혀 일도 하고 글도 규칙적으로 쓸 수 있게 된 어느 순간부터 매일, 매순간 그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생각 때문에 매일 잠이 안 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어떤 얘기까지 주고받았을까. 내가 연락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는데 도대체 왜 했을까.


왜 숨기고 싶었던, 다정해 보였지만 비참한 내 연애의 민낯을 그녀는 꼭 다 확인하고서야,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깨달아야 했을까.

왜 친구인 내 말을 믿지 않고, 그 남자친구의 눈물을 더 무겁게 생각했을까. 친구조차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내 말은 설득력이 없는 것일까.

하는 말조차 아주 가까운 누군가를 설득시킬 수가 없는데, 누군가를 울고 웃게 할 글을 내가 쓸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잘 하고 있는 짓인가.


그녀는 나에게 계속해서 간간이 연락을 해왔지만, 나는 나이를 먹고 서로의 상황이 바빠지면 멀어지는 친구들처럼, 그녀와 나 사이가 멀어지길 바랐다.


그렇게 다시 1년 반이 또 지났다. 나는 연락에 대한 답을 하지 않은 채.


어느 날, 한 달에 한두 번 오던 연락이 잦아지기 시작하더니 일주일에 한번, 사나흘에 한번, 결국 하루에 한번 꼴이 되다가 급기야 하루 종일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스무 번 가까운 전화에 일을 할 수가 없을 정도가 되어, 결국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나중에 연락하겠으니 그만 전화하라는 말을 하고 끊었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무슨 일이냐고 메신저로 물었다. 친구는 걱정했었다며 사실은 자신이 결혼을 한다고, 다른 누구보다 내가 꼭 와주었으면 좋겠어서 연락을 했다고 했다.


나는 아주 간결하게, 누가 봐도 건조한 태도가 드러나는 재수 없고 짧은 축하인사를 건넸다. 내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줄 몰랐을 것이다. 나도 그 친구의 결혼에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될 줄 몰랐다. 친구가 되물었다.


-그게 다야?


나는 그게 다라고 했고 안 미안하고, 불행하길 바라지는 않지만 진심 어린 축하는 못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축하를 못 하는 진짜 이유와 그 동안 연락을 피한 이유를 모두 말해주었다.


친구는 도대체 그게 언제 일이며, 그때 자신이 사과하고 너도 그렇게 화내지 않고 지나간 일 아니며 마음 정리가 된 남자면, 그게 너와 나 사이에 그렇게 대단한 문제일 수가 있느냐고 말했다.


나는, 네가 나쁜 의도로 그런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친구 사이라면 연애 얘기든, 속 깊은 얘기든 끝까지 털어놓으며 지내고 싶지, 너와 나눈 내 얘기를 내가 없는 곳에 가서 네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얘기할지 의심하고, 너와 해야 할 이야기가 어디까지일지 계산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고, 그게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달라고, 널 믿을 자신이 없고, 우정에 대한 내 그릇은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렇다고 해도 결혼은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일이고, 웬만해선 한번 뿐이고,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결혼하는지 너도 알지 않느냐고 말했다. 제발 와달라고.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진심이 담긴 축하를 할 자신이 없다고.

그때 일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했다.


그날, 우리가 나눈 수없이 오고간 대화 속에서 그녀는 나에게 그때의 일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녀의 결혼을 축하하지 못하는 나를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때가 그 친구 결혼식 3일 전이었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끝났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다시 3년이 지났다.


차라리 그녀가 1-2년이 지났을 그 때, 나를 기어코 결혼식에 초대하려던 연락을 포기하고 결혼을 하고, 한 10년, 20년 지났을 때, 연락을 했으면, 내가 그 일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화해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재미있었고 많이 웃었고 많이 위로받았던 순간을 생각한다. 둘이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걸어가던 어느 날, 봄이라서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부산의 밤꽃길을 서로 숨이 찰 때까지 뛰어가며, ‘술 마시고 달리는 게 진짜 달리는 거지!’ 하며 서로 깔깔거리던 날도 기억난다.


그녀와 나는 예전처럼 다시 친구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이제 나는 친구에게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는 일도, 남자친구에게 내 친구를 소개시켜주는 일도 두 번 다시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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