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다

안 될 놈이 안 되어서

by 시은


내가 누군가에게 잘해준다고 해서, 내가 잘해준 만큼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밤꽃길에 등장했던, 내 친구에게 질척거리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에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사귄 남자친구를 통해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연기를 하는 남자였다. 서울에 올라온 지 일주일 만에 알게 된 남자였고, 알게 된 지 하루 만에 사귀게 된 남자였다. 이렇게 빨리 사귀는 것은 나한테는 없던 일이었다.


평소 나답지 않은 성급한 시작이었지만, 이전과 전혀 다른 내 모습에, 그래서 진짜 사랑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얼빠진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영화 속에서나 본 것 같은 연애를 시작한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부터 진짜 인생이 시작되는 것만 같았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여자가 대학로에서 연기를 하는 남자를 만나고, 꿈이 있는 두 사람이 사랑을 시작한다.


남자친구는 내가 원래 좋아하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잘생긴 외모였다.


나는 쌍꺼풀이 없는 순한 외모가 이상형이었다. 남자친구는 그런 외모가 아니었다.


하얀 피부에 쌍꺼풀이 진 큰 눈, 서늘한 콧대에, 붉은 빛이 도는 입술이어서, 눈을 내리깔고 있으면 약간 퇴폐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도발적이고 섹시하게 생긴 외모였다. 그런 그의 옆모습을 보고 있으면 왜 남자들이 퇴폐미가 있는 여자에게 끌리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도 들면서, 이렇게 서늘하게 잘 생긴 남자가 내 남자친구라니, 내가 그동안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그동안 그저 그런, 감흥 없는 연애를 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연애를 몇 번 해 보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연애는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가 내 인생의 마지막 남자, 이 남자와 평생을 함께할 거라고 생각하니 행복했다.


나는 정식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이 남자친구가 영화배우가 되서 둘 다 꿈을 이루면 가장 좋겠지만, 만약 그 목표지점에 우리 둘 다 도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남자친구만 배우의 꿈을 이루거나, 나만 작가로서 데뷔를 해서 한 사람만 꿈을 이루고 누군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걸로 만족하는 삶이 되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면 먼저 잘 된 사람이 상대방에게 도움을 줘서 같이 성장하는 것도. 아니면 기대보다 안 풀린 사람은 살림을 도맡아 하고 다른 사람이 커리어를 쌓게 응원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결국 둘 다 안 된다고 해도 노력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하고, 서로 아끼며 사랑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더라도, 아주 시간이 많이 흘러 나이를 먹고 같이 늙어가면서, 우리 아무것도 이루진 못했지만, 그때 정말 행복했었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노부부가 된 우리의 모습도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4주 만에 헤어졌다.


나는 당시에 돈도 직장도 없는, 한달 월세 27만원 여성전용 고시원에 사는 작가지망생이었다. 그도 돈이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원래 헌신적인 인간이 전혀 아니었고,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싼 거 먹어도 괜찮다고, 오빠가 돈 없으면 내가 사면 된다고 기죽지 말라고 말했다.


아마 그 남자친구도 내가 이렇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일 줄 몰랐나 보다. 나도 몰랐던 모습이기도 했다. 만난 지 2주쯤 되었을 때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돈이 없는 이유를 말해주었다.


3년 전, 그는 음주운전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냈다. 그 음주운전이라는 말은 좀 안 맞는 것 같다. 그는 거의 매번 음주운전을 했었던 거 같다. 그는 저 날, 재수 없게 사고가 난 것일 뿐이라고, 평소엔 잘 운전했었다고 말했다.


평소엔 술 마시고 운전하지 않는다, 가 아니라, 그냥 평소엔 잘 운전했었다, 고.


그는 술을 마셨다고 해서 운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음주 여부가 운전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서 그 사고를 낸 날도 아무렇지 않게 운전대를 잡은 거였을 것이다.


자기가 생각할 때 아무렇지 않으면 운전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가 받은 차의 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안 될 놈은 안 될 놈인 게, 받은 차가 아우디였다. 음주운전을 한, 새파란 서른을 보아 넘길 수 없었던 정상인이었던 차주는 차가 아주 심하게 훼손이 된 건 아니지만, 자신의 차를 받은 운전자가 취한 것을 보고, 본사에 차량 점검 요청을 넣었다고 했다. 서너 달 뒤에 점검비가 2000만원 정도, 수리비가 3700만원 정도 나왔다고 한다. 그 수리비를 물어주기 위해 그때까지 모았던 돈으로도 모자라, 아버지한테도 손을 벌려야 했다고 했다. 면허는 취소되었다.


그는 저 사고로 반성하거나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저 상황을 묘사하는 남자친구의 말이 의심스러웠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아우디는 범퍼만 조금 찌그러졌다고 했는데 남자친구 차는 폐차해야 했다고 했다. 받힌 차가 범퍼가 조금 찌그러질 정도라면 받은 차가 폐차할 정도라는 게 진짜일까. 다친 사람도 있는데 말하지 않는 건 아닐까. 물론 차량끼리 부딪혔을 때 차의 내구성에 따라 훼손 정도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아우디가 아무리 비싸고 안전한 차라고 해도, 어느 한 차는 폐차할 정도이고, 다른 한 차는 살짝 찌그러진 정도라는 그의 말이 진짜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는 건 사랑하는 거지만, 그의 말은 많이 이상했다.


내가 생각해도 내 기분이 확 달라져 버려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연히 달라진 내 태도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매일 만나서 그런지 내가 조금만 달라져도, 어제보다 조금만 더 피곤해도, 티를 안 내려고 해도 잘 눈치 채던 남자친구였다.


그 매일 만나는 데이트 비용을 내가 냈다. 그리고 이 데이트 비용은 최소 100일 때까지만이라도 돈 걱정 없이 데이트하고 싶었던 내가 친구들에게 빌린 것이었다.


나는 일을 크게 벌이거나 소문을 내며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글을 제대로 쓰기 위해 서울에 올라간다, 말하고 올라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대부분 내가 서울에 올라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트 비용을 빌리기 위해서, 평소 잘 연락하지 않던 친구들에게까지 긴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 그 내용들을 핵심만 옮기자면, 이렇다.


누구야, 안녕. 나 시은이야. 사실 나, 글을 제대로 써보고 싶어서 얼마 전에 서울에 올라왔어. 그런데 돈을 많이 모아서 올라온 건 아니라서 생각보다 생활비가 빨리 떨어질 거 같아. 진짜 염치없지만 한 30만원에서 50만원 정도 빌려줄 수 있으면 고마울 것 같아. 6개월 정도만이라도 진짜 글 쓰는 데만 집중하고 싶어서 일을 안 할 거거든. 빨리 갚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 6개월이 지난 다음부터 일을 할 계획이고 숨만 쉬어도 나가야 하는 생활비도 있기 때문에 그 6개월 뒤부터 나눠서 갚을 거야. 안 갚고 연락 안 되는 일은 절대 없을 테지만, 혹시라도 믿기 힘들다거나 한 두달 안에 갚아야 하는 거라면 굳이 빌려주지 않아도 돼. 갑자기 연락해서 이런 말해서 미안. 안 빌려주더라도 부담 안 가져도 되고 답장 안 해줘도 원망하지 않을 건데, 나중에 이 일로 우리 친구 사이에는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봐도 긴데 카톡으로 보면 더 길었을 저런 내용을 스무 명 정도한테 카카오톡으로 보낸 것 같다.

쉽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상황인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하루 만에 답이 온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서울에 올라가 있다는 친구한테 부산에 있는 친구들이 덥석 빌려주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찾아갈 수도 없으니 더욱 그럴만했다.


나는 진짜 사랑이라고 믿는 이 남자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고 싶었다. 그리고 카카오톡에는 민망하고 미안하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때 나는 사랑에 정신이 나가 있어서 두 세달만이라도 돈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편하게 데이트할 수만 있기만 하다면 좋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생각이 없어서 별로 창피하지도 않았다.


29살이라는 도전하기에 이르지 않은 나이에 거의 준비 없이, 무모하게 꿈을 이루겠다고 서울에 덜컥 올라갔다고 고백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친구들은 하루나 2-3일 뒤 생각보다 이것저것 묻지 않고 돈을 빌려주었다. 내가 130만원 모아서 올라간 서울에서, 그렇게 한 450만원 정도가 빌려졌다. 그렇게 돈을 모아서 만나고 있는 사람이 음주운전을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내 사랑은 온도가 확 식었다.


남자친구는 항상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셨고 그럴 때면 꼭 세상을 원망하는 말을 했다.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 사람인데, 부터 해서 부모님도 나를 몰라준다, 로 이어졌다. 예전에는 그런 그가 안쓰러웠다. 얼마나 꿈을 이루고 싶으면 낮에는 못하는 이야기를 이렇게 밤에 술의 힘을 빌어서 말할까.

그 세계는 너무 좁고, 너무 멋지고 잘난 사람들로 가득 찬 곳이니까 발가락 하나 밀어넣기도 쉽지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그런 그가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 같았고, 그가 울먹거리면 나도 같이 울면서 내가 있으니까 힘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음주운전을 했던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니 무슨 얘기를 하든 별로 동정이 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매일 듣던 레파토리이기도 했다. 사랑이 넘칠 땐 매일 들어도 같이 울었던 내용이었는데.


그가 말하게 놔두자 알게 된 것 중 인상적인 것은, 그가 면허취소가 된 현재도 음주운전이 딱히 범죄의 영역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무슨 얘기가 됐든 더 듣고 싶지 않아 단답형의 대화로 짧게 말했던 것 같다.


고시원에 가서 내 시나리오를 보고 싶었고 더 이상 그의 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만 집에 가면 안 되겠냐고 했다. 더 이상 그가 쏟아내는 그의 정보를 알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마 그의 본모습을 외면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 뜨뜨미지근한 태도를 되돌리고 싶었는지 그가 이런 얘기는 아무한테도 한 적이 없다며 사실은 자신의 부모님이 5층짜리 연립주택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 건물의 가격이 10억이 넘는다고 했다. 음주운전 얘기를 하다가 왜 이 얘기를 왜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가 자신의 계획이라며 털어놓는 얘기는 그 잘생긴 외모와 달리 한심하기 짝이 없는 얘기였다.


형이 공부를 잘 했긴 해지만 자신은 못 갔다 온 유학도 혼자만 갔다 오고, 크면서 혜택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러니 그 주택만큼은 온전히 자신이 물려받을 거라고 했다.


의아했다.


재산을 물려주는 건 재산 소유자인 부모님 선택 사항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걸 똑같이 나눠줄지 형에게 더 줄지, 그에게 더 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그의 부모님께서 사회에 환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너무 이상해서 도대체 무슨 근거로 부모님이 그 재산을 오빠에게 다 물려주실 거라고 생각하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또 갑자기 거기에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실은 내가 고시원에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서, 자신의 부모님 집에 들어와 같이 살자고 했다. 그리고 내가 효도를 잘 해서, 아직 자신을 믿지 못하는 부모님 마음을 사로잡아 물려받자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어디서부터 한심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우리 부모님과도 생활방식이 완벽하게 맞을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고시원에라도 나와서 살고 있는데, 완전 생면부지인 그의 부모님 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말하는 것이 어떻게 내가 고시원에서 쓰는 것보다 마음이 편할 거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 눈에야 멋있고 잘생긴 남자친구지만, 그의 부모님 입장에서 보자면, 건실한 회사에 출근하는 큰아들 놔두고, 반반한 얼굴 믿고 연기하겠다고 서른이 넘도록 아르바이트 비슷한 벌이만 하며 매일밤 술을 먹고 들어와 술주정을 부리는 둘째아들을 과연 뭘 믿고 예쁘다고 자신들이 평생 고생하며 모은 재산을 덜컥 물려줄 것인가.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29살 밖에 안 먹은 나라도 안 물려줄 것 같은데, 70 평생 고생고생해서 모은 돈을 놀기 좋아하는 아들한테 얼굴 잘 생겼다고 물려줄 부모가 과연 있을까.


무엇보다 그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효도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연히 티가 날 거고, 안 물려주실 수도 있고, 그때 가서 그 서운함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효도는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그런 목적을 갖고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보통 재산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물려주시는 게 대부분인데, 요즘 같은 시대에 100세 이상까지 얼마든지 정정하실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도 돈 모으기 힘든 걸 몰라서가 아니다. 그 재산만 바라본다면 물려받을 때쯤 그와 나의 나이는 60대 중반이 될 수도 있는데 그 나이까지 그 재산만 바라보고 사는 인생은, 쉽게 말해 별로 폼나 보이지 않았다.


뭐가 됐든 우리가 우리 힘으로 벌어서 살아야지 그 재산 물려받을 생각만 하며 그분들한테 효도한다는 것은 별로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는 그를 완전히 놓을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생각 못 했던 부분이라 많이 놀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가 말하는 다른 농담들에 웃어지지가 않았다.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낸 적도 있고,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지만, 내가 헌신적으로 대한다면, 내 사랑으로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랑은 위대하니까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 정말 사랑하니까.


하지만, 그가 가진 습관은 언제라도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습관이니 결혼 전에 이 습관을 완벽하게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고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나를 사랑하니까.


내 친구가 이런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했다면 당연히 미쳤냐며 뜯어말렸을 인간이었지만, 원래 남의 연애는 쉽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고 나 역시 내 연애 앞에서 똑똑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를 계속 만나고 싶은 마음에 헤어지는 게 맞는 일이라고, 그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머릿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술 마시는 남자친구 습관 고치는 방법’, 을 입력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고칠 수 없다고 말했다.


못 고친다. 같이 박 터지게 싸울 자신 있으면 만나라. 그 사람 부모님도 못 고친 습관을 님이 어떻게 고치냐. 고칠 습관이었으면 그 전의 여자친구가 고쳤을 거다.


인터넷을 검색한 건 나였으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인터넷 얘기를 어떻게 믿어. 내 남자는 다를 수도 있지. 나는 대다수의 경험담보다 내 남자친구를 믿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에게서 직접 증명받고 싶었다.


한달만이라도 술을 먹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는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냐고, 날 사랑하지 않느냐며 투정을 부렸지만, 어쨌든 내가 원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런 그가 고마웠다. 내 말을 들어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잘 지켜만 준다면, 3주 정도에, 고맙다고, 꼭 안 채워도, 날 위해서 그렇게 해줘서 고맙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는 그 약속을 한, 그날 바로 술을 마셨다. 숨기지도 않았다. 친구들과 반주로 소주 좀 마신다고 했다. 내가 약속을 어긴 것에 서운해 하자 반주가 어떻게 술이냐고 했다. 나는 마음에 열불이 나는 것 같았다. 점심때 한 약속을 저녁에 어기는 인간이라니.


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약속을 어긴 것이 중요했다. 얼마쯤 마신 거냐고 물었다. 친구들 2명과 세 명이서 소주 2병 반 정도 마셨다고 했다. 내가 본 그는 술을 자제하거나 사양하며 마실 스타일이 아니었으니 한잔만 마신 것도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또 확인해야 했다.


-오빠가 생각할 때 반 병 넘게 마셨어?

-당연히 반병 넘게 마셨지. 한 병은 내가 마셨을 걸. 한 병이 무슨 술이야.


나는 그 다음날 헤어지자고 말했다. 도저히 나는 오빠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오빠가 스스로 바뀔 수 없다면 언제까지 내가 오빠에게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하며 내 에너지를 쓸 수는 없다고.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아도 나만큼 잘 쓰거나, 나보다 잘 쓰는 작가지망생들이 많이 있을 것이었다.


심지어 프로의 세계에도 이미 잘 쓰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미친 듯이 글을 써도 모자라는데, 그런 중요한 시점에, 시간을 쪼개서 데이트하는데, 오빠 걱정 되서 잔소리까지 해야 하는 연애는 하기 싫다고.


말은 저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저 정도까지 내가 세게 나가면,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줄 몰랐다고 내가 노력하겠다고, 그럼 나는 못 이기는 척 받아줄 생각이었다. 우리 사랑이 그 정도로 별 볼일 없는 건 아닐 거니까.


그리고 그날 새벽 나에게 온 메시지는 반성이나 화해의 내용이 아니었다. 내가 이때까지 들어본 적 없는,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남자의 욕설이었다. 내가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썼던 장문의 카카오톡만큼이나 긴 내용의 욕설이었지만, 그 길었던 모든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나의 단어와 그가 나에게 하고자 했던 행동은 기억이 난다.


걸레 같은 X. 이라는 말.

네가 사는 고시원에 불 질러 버릴 거다. 라는 내용.


내가 헤어지자고 말했지만 내가 차인 것 같은 이 이별 후 3주 만에 7kg 이 빠졌다. 그의 성격상 4주 만나고 헤어진 여자한테 복수한다고 집착해, 내가 사는 곳 근처를 어슬렁거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가진 외모면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 내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나 몰라 그가 정말 불을 지를까봐, 나는 그에게 이사 갔다고, 고시원에 이제 나는 없다고, 불을 지르는 생각은 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을 안 할 수 없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답은 오지 않았다. 비참했다.


나는 작가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작가가 안 된 것보다, 그가 대단한 배우가 되지 않은 게 더 안심이 된다. 안 될 놈이 안 된 거지만, 그래도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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