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김에, 그래도 잘 된 거라 생각하자
얼마 전에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영화를 보는데 제목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태어남, 이 선택 가능한 영역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뉘앙스의 제목이라서.
태어나길, 내가 선택가능한가?
아닌데. 태어나는 거, 선택 가능한 부분 없는데. 나, 태어나는 거 선택한 적 없는데. 아마 대부분 선택한 적 없을 건데.
나는 <인간실격>의 이 명문장도 싫어한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사실, 책도 워낙 유명하고 저 문장 역시 하도 유명한 문장이라 명문장이라고 해두긴 했지만 나에겐 명문장이 아니다. 그냥 어불성설이다. 태어남을 선택/비선택할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는가.
태어남의 상황에서 ‘태어나는 존재’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하나라도 있던가. 생부,생모가 성관계를 한 결과와, 그 두 사람이(간혹 한 사람이) 출산을 하기로 한 선택으로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지, 그 ‘한 생명’이 무슨 대단하고 원대한 의지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혹은 ‘멋지게 살아야지’ 하고 태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시궁창 같은 환경ㅡ예를 들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그로부터 아이를 지킬 여력이 없는 어머니, 경제적 상황은 한달 벌어 한달 먹고, 각자 아이의 조부모/외조부모의 도움은 기댈 수도 없는 형편, 정도로 하자ㅡ인데 ‘태어나면 그 두 사람이 부모’일 태아에게 ‘태어날래?’ 혹은 ‘태어나지 말래?’ 의견을 물었을 때 태아에게 ‘상황판단능력’이라는 게 있다면 ‘죄송한데 저는 안 태어나겠습니다.’ 하고 안 태어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사실 저 상황에서 태아가 죄송할 일도 아니지만.
하지만 태아는 그럴 수 없고, 사실 태어나고 나서도 태어나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단기간에 알아차릴 수가 없다.
아니, 아무것도 모른다. 좋은 환경일지, 평균의 환경일지, 시궁창 같은 환경일지, 태어나고 나서 최소 5-6년 될 때까지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어쩌면 태어난 지 15년 쯤 되야 이번 생은 망했구나, 안 망했구나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고 포인트는 생부, 생모가 일단 낳기로 하면 그냥 태어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하튼, 영화는 부모님은 사고로 일찍 돌아가시고 꿈이 있긴 한데, 돈도 잘 못 벌고, 사실 별로 살고 싶지도 않아 하는 여주인공 춘희가 호감을 느끼던 남자와 썸을 타고 연애를 막 하려는 것 같더니, 갑자기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고 더 좋은 여자 만나라고 청승을 떨며 붙잡는 그 남자를 떨구고, 영화 후반에 가서는 살던 집에서까지 쫓겨나지만, 그래도 결국 행복해지기로 결심하면서 그래도, ‘태어나길 잘 했어.’ 라는 나레이션으로 끝난다.
너무 간략하게 설명한 거 같긴 한데 진짜 저 줄거리가 다다. 물론 중요한 디테일은 왕창 빠져있긴 하다.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게 그 디테일들은 아니라서.
영화의 후반부에, 춘희는 자신이 사는 집의 집주인인 사촌오빠로부터 집 팔게 나가달라는 말을 듣는다. 사실 사촌오빠는 바람이 나서 이혼하고 새출발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집 팔아서 이혼하려는 것이다. 춘희는 사촌오빠에게 그동안 말하지 못한, 쌓이고 쌓였던 자신의 감정을 와르르 쏟아낸다. 온갖 설움을 다 말한다.
그리고 밥 먹으러 간다. 그동안 춘희는 돈 아끼느라 삼시세끼 육개장 사발면만 먹고 살았는데 드디어 어린 시절, 사촌오빠 가족들이 자신만 빼놓고 먹으러 갔던 메뉴인 갈비를 혼자서 먹으러 간다. 그리곤 좀 청승맞게 열심히 먹는다. 사람이 거의 없는 갈빗집에서.
그리고 나서 자신이 구해준 거지아가씨랑 대화도 좀 하고. 여튼 이런 저런 이야기가 좀 더 있긴 했는데 대충 그러고 끝이 났다.
영화가 끝나고 함께 본 남자친구가 물었다.
-근데 한 시간 반 내내 우울해하다가 후반 한 5분 전부터 왜 갑자기 급 행복해지기로 한 거지?
내가 봐도 너무 급 마무리가 된 것 같기는 했다.
갑자기? 갑자기, 태어나길 잘했다고? 춘희씨,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지 우리에게 설명 좀 해주고 갈래? 그래서 그 남자랑 연애는 할 거야, 말 거야? 응?
하지만 설명 없이 춘희 씨는 발랄하게 떠났다.
그녀가 살기로 한 이유. 그것도 그냥이 아니라 행복하게 살기로 한 이유.
뭔가 설득력 있는 이유를 붙여주자면, 내 생각엔 갈빗집 이모가 서비스라며 공짜로 사이다를 주고는 ‘후식 뭐 먹을래요?’ 라고 물어봐준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사소한 친절에 감동해서, 이런 친절을 좀 더 받기 위해, 그것 때문에 살아보고 싶어져서.
남자친구는 그녀가 행복해지기로 한 이유가, 그동안 사촌오빠에게 못 했던 가슴에 쌓여있던, 하고 싶은 말을 원없이 다 해서 같다고 했다.
우리의 답은, 우리 각자의 스위치가 아닐까.
나는 청소년기에 가끔 우울하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살고 싶어지는 스위치는 ‘타인의 친절’이었다. 사소한, 정말 별 것 아닌 타인의 친절 덕분에 그 고비만 넘기면, 또 그럭저럭 살아졌다. 행복하게 까지는 아니어도.
그래서 남자친구에게 그가 살고 싶어지는 스위치는 ‘하고 싶은 말을, 그걸 들어야 할 그 사람에게 눈치보지 않고 속시원히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닐 수도 있고.
태어난 김에 사는 거긴 한데, 살기로 한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 그리고 남들 보기엔 별 거 아니어도, 살고 싶은 이유가 한 가지가 아닌 건 좋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