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들은 이야기
글 쓰는 사람들이 로망처럼 그리고 싶어 하는 시대가 있다. 일제시대 이야기이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고 생각과 생각이 부딪치고 청춘들의 마음이 뜨겁고 모든 조연 캐릭터 마음이 다 복잡할 수 있게 그려도 그럴 수 있겠다 싶은, 우리나라지만 우리도 두 번 다시 겪으면 안 될, 그리고 겪기 힘든 독특한 시기. 미국으로 치면 재즈시대쯤 될 거 같다. 그러고 보니 두 때가 동일한 때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관계자들이 기피하는 시대의 이야기다. 왜 그런지 아주 정확하게는 나도 잘 모르지만 일단 통계상으로 저 시기의 드라마나 영화가 잘 되지 않은 편이 더 많다. 작가들이 쓰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관객들이 생각보다 안 찾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는 암살, 밀정, 미스터션샤인은 아주 드문 예다. 심지어 암살조차 투자 및 제작이 몹시 힘들었다고 했다. 연출도 좋았고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던, 난 무척 좋았던 모던보이도 흥행은 못했다.
나도 예전에 일제시대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자료 조사를 이것저것 했었다. 몇 년 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도 그래서 가게 되었다. 그때 듣게 된 이야기인데 고백하자면 아주 정확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형무소를 다 둘러보고 나서 그 안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서 그 앞 테이블에서 먹고 있었다. 근처 테이블에서 할머니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게 들렸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들리는 걸 굳이 안 들으려고 하지 않아서 많은 내용을 듣게 되었다.
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한테 돈을 3-4000만 원쯤 빌려주셨고 그 돈 아들이 갚으라고 줬는데 받을 거냐고 물어보는 중이었다.
그 돈을 빌려준 할머니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고, 빌린 할머니도 크게 미안해하지 않으며 알겠다고 했다. 저 큰 금액을 말이다.
돈을 빌렸던 이유는 아들의 유학을 보내기 위해서였는데 빌린 할머니의 남편이 독립운동한다고 집안에 돈이 없어서 이 할머니한테 돈을 빌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맥락상(어쩌면 나의 추측상) 돈을 빌려준 할머니의 남편은 친일을 해서 부를 축적한 듯했다.
이제 두 분 다 남편은 돌아가신 듯했다. 독립운동한 쪽의 할머니가 돈 빌려준 할머니한테 남편 안 그립냐고 묻자 그립다고 했다. 남들은 나쁜 놈이라고 했어도 자신과 자식들한테는 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말을 했다.
돈 빌려준 할머니가 독립운동한쪽의 할머니한테 물었다. 너는 남편 안 그립냐고. 할머니는 그리운 것보다 묻고 싶다고 했다.
당신 눈에 나라만 들어오고 고생하던 가족은 눈에 안 들어오셨느냐고. 내가 다 알아서 가족 건사한 거 말하자면 죽을 때까지 하루 종일 말만 해도 다 말 못 한다, 했다. 돈 빌려준 할머니 덕에 독립운동한 쪽의 할머니는 자식을 제대로 키우긴 했지만 그 돈은 돈빌려준 할머니에게 친일을 한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친일을 했다고 독립운동한 남편을 가진 친구 아들 유학비로 몇 천만 원 빌려주는 통 큰 여자가 많지는 않겠지만.
이제 경제적 기반이 어느 정도 잡힌 아들에게 할머니는 유학비의 출처를 말하셨고 갚으시라고 아들이 어머니에게 그 돈을 주었는데 그 돈을 받을 거냐고 묻자 빌려준 할머니는 그냥 됐다고 하신 듯했다.
돈 빌려준 할머니 남편이 친일을 했을 거라는 건 내 가정이고 의심이다. 그 할머니가 젊었을 적 남편이 나쁜 놈 소리 들었을 일이 사기, 강도, 고리대금업자일 확률보다 친일이었을 거 같고 편의점 사장님으로 보이는 안에 있던 분이 독립운동한쪽할머니를 향해 어머니, 추우니까 들어오세요, 하고 말했는데 보통 이런 곳에 가게를 입점할 수 있는 건 독립유공자의 후손일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들어서이다. 지인의 어머니인데 어머니라고 했을 수도 있지만 그 할머니의 남편이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라고 하니까 그렇지 않을까 짐작해 보는 것이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쓰던 시놉시스도 있었는데 시나리오 쓰는 것도 포기한 김에 누가 그 시대 이야기 쓰고 싶은데 아이디어가 부족하면 사용하시라고 한번 써보았다.
대가는 필요 없고 정말 혹시나 이 아이디어를 조금이라도 참고해서 제작되면 아이디어 제공자라는 식으로 이름이나 올려줬으면 하는 바람은 솔직히 있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게는 안 될 거 같다. 너무 예민한 주제이기도 하고, 우리나라가 아직도 친일파를 청산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캐릭터를 우리가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 되었을 거 같다.
친일을 했지만 가정적으로는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캐릭터를 받아들이기도 불가능할 것 같고, 독립운동을 했지만 가정적으로는 무심했던 남편이자 아버지라는 캐릭터에 불편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비록 현실이라고 하더라도.
사실 나도 그래서 개고생 해서 쓰고 욕먹을까 봐 포기한 마음이 없다고는 못 하겠다.
안으로 잘하고 밖으로는 못 될 수 있었으며 밖으로는 훌륭한 인간이었으나 안으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었구나, 라는 이 이야기를 쓰고 싶으면 누구든 쓰시라고 그냥 세상 밖에 던져본다.
사실 암살 10번 넘게 봤다. 난 너무 좋았고 새삼 그분들에게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