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 그리고 표절에 관한 문제
글을 안 쓰다가 많이 썼더니 돈도 많이 쓰고 싶어 져서 쇼핑을 하고 돌아왔다. 쇼핑이랄 것도 없는 필수 화장품과 맥주 1캔이 다지만.
그러다 갑자기 시나리오 아카데미에서 알게 된, 가끔 이태원에서 함께 헤이즐넛 맥주 같이 마시던 친구가 생각났다.
소재는 그 사람만의 것이므로 여기서 그 내용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 친구가 쓴 소재는 내가 보기에 새로울 것도, 대단한 구조를 가진 것도 아닌 평범하고 진부한 사랑 이야기였다.
속물적으로 말하자면 상업적으로 팔릴 것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련한 사랑 이야기였는데 흘러가는 방식이나 소재가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이야기였다.
그 수업은 2주에 한 번씩 총 8번 진행되는 수업이었는데 4번의 수업 내내 계속 그 이야기를 가지고 시나리오로 쓰려고 해서 다들 다른 이야기를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공모전 당선이 목적인 돈이 되고 팔릴 만한, 그래서 자극적이기도 한 소재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하는 사람들이 주로 듣는 수업이라 그 친구의 소재는 밋밋하기 짝이 없었고 그래서 공모전에 안 뽑힐 거 같았다. 우리는 모두 잘 되는 게 목적이었고 그래서 누가 됐든 공모전에 뽑힐 만한 이야기를 썼으면 했다.
이태원 헤이즐넛 친구는 다른 본업이 있었고 일 때문에 바빠서 새로운 사건을 생각해내기 어려웠는지 처음 썼던 이야기에서 크게 진전이 없었다. 거의 두 달 동안 쓴다고 썼을 텐데 분량도 크게 늘지 않고, 이렇다 할 사건이 더 늘어난 것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이태원 헤이즐넛 친구가 말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예전부터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단편, 독립영화라고 해도 제작이라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래도 여러 방면으로 노력해서 연출부 모으고 배우까지 캐스팅해서 스케줄까지 잡고 촬영에 들어가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여러 여건상 어려워 포기할 수밖에 없어서 제작되지 못하고 엎어지고 말았다. 그 줄거리를 자신과 5년 동안 사귄 전 남자친구가 헤어지고 나서 단편영화로 만들어서 상을 받았다고 했다. 심지어 자신이 캐스팅했던 그 배우로 그 영화를 찍었고, 그 배우와 사귀었고, 그 상으로 인해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규모 콘텐츠법인에 들어가서 일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원래 자신의 이야기였던 이야기로 남자친구가 자신의 것인 양 만든 걸 알게 되자 잠이 안 와서 미칠 것 같아서, 반드시 자신이 더 잘 만들어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놓지 못하겠다고 말이다.
영화 ‘비긴 어게인’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내가 만든 무언가를 누군가 자기 것으로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참 기분이 더럽고 빡칠 일이다. 그제야 그 친구가 왜 그 이야기를 놓을 수가 없는지 이해가 갔다.
저런 일은 생각보다 꽤 있어서 나도 어떤 상황에서건 이야기 소재나 대사 하나하나에 내 권리를 확실히 해 두는 게 마음이 편해서 아무도 모르게 뻔뻔했지만, 이런 일도 있긴 했다.
예전에 개인적으로 어떤 흉악범한테 큰 피해를 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을 알게 된 친구 Z가 경찰에 신고하자고 했는데 사실 고의성이 분명하고, 아무리 흉악했더라도 그 일로 인한 직접적인 물리적, 신체적 피해가 없으면 법적 처벌이 어려운 분야의 일이라 그 진부한 싸움을 할 자신이 없어서 신경 끄라는 식으로 말했다.
나도 분하긴 했지만 나보다 그 친구가 더 심하게 화를 내며 나에게 이건 가만있을 일이 아니라고, 가만히 있으면 그런 놈들은 그런 식으로 이빨을 키울 거라고 말했던 일이었는데 솔직히 나는 신고하기가 싫었다. 법이 내 편이 아닐 확률이 높은 일이라 신고 후에 처벌이 될지 말지 모르는데 힘과 시간을 쓰기가 아깝고 귀찮았다.
그 친구 앞에서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된 처벌이 될지 안 될지 모를 그 일에 시간을 쏟느니 그럴 시간에 글을 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친구는 나를 계속 설득하려고 했고, 계속되는 그 친구의 설득에 내가 좀 짜증이 나서 말했다. 흉악범이긴 한데 그 인간도 한 집안의 가장인데 내가 신고를 해서 그 가정을 파괴하게 되는 건 싫다고, 그도 누군가의 평범한 아버지라고. 너도 그렇게 생각해버리라고.
그러자 Z가 너는 이게 누군가의 아버지라고 생각해서 봐줘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봐줘도 되는 인간인 건 아니라고 말했다.
나는 그 일로 예민해지고 짜증이 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반화의 오류인데 그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개소리를 하고 말았다. 너도 한국 남자인데 그냥 같은 한국 남자로서 그냥 좀 넘어가면 안 돼?
Z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 새끼와 같은 한국 남자가 아니야. 너는 히틀러와 모든 독일 국민이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해?
나도 흥분해서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니, 말이 좀 심한데? 그 새끼가 하려던 짓이 심하긴 했어도 그 일이 히틀러가 한 짓이랑 비교가 돼?
지금 생각해보면, 나보다 더 내가 겪은 일에 고통스러워하던 친구였는데 저딴 식으로 말해버렸다. '인생이 아름다워'를 인상 깊게 보기도 했지만 히틀러가 한 짓 및 유대 민족이 겪은 고통을 생각하니 저 비유는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그 친구도 비유가 심하다고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내 강경한 태도에 놀랐는지 화를 내다 말고 수그러들어서 미안, 이라고 말하며 사과했다. 자기가 심하게 말한 거 같다고. 그때 대화를 나누던 곳이 학교 도서관 근처 벤치였는데 짜증이 날 대로 난 내가 이제 그만 혼자 있고 싶으니, 너 먼저 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가고 나서 잠시 마음을 다 잡고 있는데 어찌 됐든 저 친구가 말한 비유는 나중에 영화 대사에 쓰기 좋을 것 같았다. 생각해보지 못한 참신한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어떤 범죄 미수자를 같은 한국 남자로서 이해해라, 고 말하면 다른 한 사람이 나는 그런 새끼와 같은 한국 남자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히틀러와 독일 국민의 비유를 대는 것 말이다. 어떤 이야기의 영화를 써야 그걸 집어넣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친구가 다시 왔다.
나는 움찔해서 왜 다시 왔느냐고 물었다. 혹시 이 대사 자기가 영화 시나리오에 쓸 거니까 나보고 쓰지 말라고 온 건가 싶었다.
그리고 Z가 자기가 그 대사 쓸 거라고 말하면, 내가 겪은 일 때문에 너도 그런 말을 생각하게 된 거니까 내 지분도 있다고 말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좀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표현에 있어 소유권은 중요하다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다. 내가 다니던 학과가 미디어 창작과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다른 애들보다 원래 표현, 표절 문제에 있어 좀 예민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아무리 작은 부분이라고 해도 포기하거나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 말 역시 내 권리를 역시 주장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며 다시 온 그를 조금은 차갑게 쳐다봤다. 못 쓰게 하기만 해 봐라, 하고.
몇 초 후 알게 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한 말이나, 그 말을 시나리오에 쓰거나 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Z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하지 못하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한번 안아주고 가도 되느냐고. 나는 눈썹을 조금 꿈틀 하며 왜?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안쓰러워서.
그렇게 3초 정도, 벤치에 앉아 있는 나를 그 친구가 선 채로 안아주고는 내려갔다.
흉악한 일이란 성폭행을 당할 뻔한 일이었는데 그다음 날 친구가 만나서 나한테 제발 신고하자고, 처벌받게 하자고, 힘든 일 있으면 자기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도와주겠다고 한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그 친구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했던 저 말들을 나는 내 시나리오에 대사로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멘탈이 강했던 것인지, 작가로 성공하고 싶어서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토록 미치도록 쓰고 싶었던 시기도 지났고 한참 쓸 때도 저 대사를 써먹을 이야기를 구상하지는 못했다. 저 말은 그때 그 상황 그대로 써야 했던 이야기였나 보다.
이태원헤이즐넛친구는 8회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 시나리오를 놓지 못했다. 그 당시에 완성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완성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더이상 시나리오를 쓰지는 않지만 표절이나 표현에 대한 부분은 글 쓰는 사람들에게 항상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태원헤이즐넛 전남친은 다른 사람이 처음 생각한 이야기를 자신이 쓰고 싶었으면 써도 되냐고 묻고 그에 대한 대가도 좀 지불했어야 맞지 않나 싶다.
물론 저작권협회 기준에서는 저 정도 상황은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되어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