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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Jul 27. 2019

나 같으면 안 만났다

나 같은 여자

아무래도 현자 타임이 온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지금껏 왜 이렇게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그 시간 말이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고, 지금도 별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글을 써야 하니 일주일 혹은 길면 2주일 정도 만나지 못하더라도, 연락이 잘 안 되더라도 이해해달라고 말하는 나를 이해하고 만났던 남자친구들이었다.


공모전기간은 보통 2-3달 전에 발표된다. 그걸 보고 작품을 쓰기 시작하면 이미 늦었다. 영화시나리오라는 게 A4용지를 기준으로 시놉시스 빼고 시나리오만 해서 60매에서 길게 쓰면 100매가 넘어간다.


그게 한 두달 만에 나올 수는 없다. 나는 시나리오 하나 완성하는데 1년씩은 걸리는 것 같다. 초고는 3개월만에 뽑는데 만족할 만큼 고치는데 몇 개월 걸린다.


김지운 감독은 백수 때 '조용한 가족' 시나리오 일주일만에 써서 당선됐다고 하던데 그래서 그 분이 잘 나가게 된 걸 거다.


사실 내가 영화 생태계에서 안 좋아하는 존재 방식이다. 감독이 연출만 안 하고 글까지 잘 쓰면 시나리오 작가들이 별로 필요가 없다. 시나리오 작가들의 수요가 적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다들 김지운 감독 같은 그런 능력은 없기 때문에 이미 쓰고 있던 작품을 공모전 시기에 맞춰 고치고 낸다.


몇년간 공모전에서 헛물을 마시고야 알게 된 건 신인, 기성 제한 없는 그런 공모전에 기성들도 참 많이 도전한다는 것이다. 기성 작가들도 먹고 살 길이 아주 고속도로처럼 뻥뻥 뚫려 있는 게 아니라서 무슨 길이 하나 열리면 얄궂은 작가 지망생들 먹고 살길까지 그분들이 배려할 수는 없어서 그들도 모두 그 길로 진입한다.


당연히 정체가 시작되고 나 같은 작가 지망생들은 가망성이 더 낮아진다. 낮다는 말은 그냥, 떨어졌다는 말이다.


내가 노력했던 많은 시간은 그냥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공중으로 분해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작가 지망생들 중에도 천재라서 깡패처럼 잘 쓰는 사람들은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뭐가 됐든, 어떻게든 됐겠지만 그게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작가로 잘 될 줄 알았던 사람이었으므로 노력을 많이 했다. 원래도 글을 열심히 썼지만 공모전 한 달 전은 평소보다 훨씬 스퍼트를 올려서 썼다. 백수일 때는 씻지도 않고 화장실도 참아가며 썼고, 직장인일 때는 출근 두 세시간 전까지 썼다.   


새로운 시나리오를 이제 막 쓰기 시작했는데,누군가 사귀자거나 만나자고 하면 글을 써야 해서 못 만난다고 하고, 글을 쓰고 있는 상태이며 누군가를 사귀고 있는 동안 공모전이 발표되면 저게 기회인데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마치 큰 일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 친구한테 미안한데 글을 써야 하는데 내가 너랑 연애한답시고 연락주고 받고 하면 플롯도 집중이 안 되고 이야기속 캐릭터들 감정도 잘 못 살릴 거 같으니 일, 이주일 집중해야 해서 연락을 잘 못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연락을 피하거나 산속으로 들어갈 건 아닌데, 카카오톡을 못 읽을 수도, 보긴 보지만 답장을 못 할수도, 전화를 못 받을 수도 있다고.


연락이 될 수도 있지만 못 할 가능성도 많다고. 집 근처로 찾아와도 상관없고, 왔다고 하면 나가긴 할 건데 길게 만날 수는 없다고. 이런 이기적인 개소리를 하는 나와 그럼에도 연애를 했던 친구들이 있었다.


훗날 나도 음악하는 잔나비띠 남자한테 내가 했던 짓을 똑같이 되돌려 받았는데 당해보니까 정말 기분이 더럽고 치사해서 말도 없이 연락이 두절될 때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고 그러다 연락이 닿으면 이때다 싶어 서운한 점을 폭풍이 몰아치듯 내 감정을 설명하고 그에게도 연락이 안된 부분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을 구구절절 요구했는데 물론 그는 그렇게 해주지 않았다. 진짜 냉정히 말하자면 진지하게 사귀는 사이도 아니긴 했다.

 

그렇게 빡치게 하는 인간이면 그 순간 바로 헤어지는 게 맞는데 내가 더 많이 좋아해서 참고 만나보려고 꽤 오래 노력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좋아하고 그가 아무리 귀엽고 그가 하는 일이 중요하고 멋있어도 연락이 잘 안되는 상황이 반복되니까 더럽고 치사해서 끝냈다. 헤어진 것도 아니고 좋아한 마음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냥 끝냈다. 나는 잔나비보다 내 남자친구들에게 더 상세하게 내 입장과 상황을, 그리고 연락이 두절되기 전에 미리 말을 해주었다는 차이가 있지만, 나나 잔나비나 연인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고 싶으면 연락이 잘 안 되는 문제점을 가진 인간, 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도찐개찐 이긴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공모전이 나의 빛이고 기회인 것 같아서 나는 공모전만 맞닥뜨리면 정신 못 차리고 만나던 친구들을 등한시했다. 얼마나 속이 끓었을까. 집중해야 하는 시기가 시작되면 나 역시 별로 자세히 얘기 안 해줬다. 그럴 여력이 없었다. 글에 쓸 수 있는 힘을 쏟고 나면 만나서 밥을 먹어도 밥 먹는 수저를 드는 손이 다 떨렸다.


여하튼 그렇게 쓰고도 나는 결국 잘 나가는 작가도 아니고, 심지어 그냥 작가도 안 되고 보니 그 친구들이 왜 그렇게 나를 이해해주며 만났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 같으면 더럽고 치사해서 며칠 못 가 문자로 좋은 사람 만나라고 했을 거 같은데 말이다.


내가 공모전 때문에 연락이 잘 안 될거라고 말하며 사실 내가 뭔데 니가 그걸 다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만나야 하냐고, 헤어지면 힘들기야 하겠지만 헤어지자고 말해도 너를 원망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헤어질 때 헤어졌더라도 저 문제 때문에 헤어진 친구는 없었다.   


시간이 많았을 때 남자친구들이 내 연락두절의 고통을 참은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해 봤는데 어쩌면 성비가 여자에 비해 남자가 너무 많아서 또 어디 가서 새롭게 누굴 다시 만나나 싶어서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친구들 딴에는 좋아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너무 사회학적으로 생각하나 싶기도 하다.  

 

여하튼 겪고 보니 나 같으면, 나는 글 쓰는 여자 안 만났을 거 같다. 더럽고 치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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