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게 없다는 것은
영원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엄마를 영원히 사랑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게 되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싶어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좀 극단적인 성향이 있어서 내가 죽을 때까지 글 쓰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결국 글로 밥벌이를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글을 포기하지 못할 줄 알았다.
남편도 돈도 없이 폐지를 주으며 살아가면서 낡은 반지하 집으로 돌아가 낡은 노트북에 시나리오를 쓰는 근근이 살아가는 70대 여자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해 본적이 있다. 그런 상상을 한 적이 많았다.
어떤 때는 그 상상이 지나치게 과도해져서 폐지를 줍는 할머니들을 보면 저 분들이 집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 있을 것 같았다. 다 글을 쓰는 여자여서 저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만 같았다.
그 삶이 비참한 삶이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나는 시나리오, 혹은 글 쓰는 것을 포기하기가 싫었다. 아니 포기가 안 되었다. 그게 더 비참하기도 했다.
이깟 글이 뭐라고 하는 생각도 들면서.
왜 이게 포기가 안 되나 스스로 원망스럽기도 했는데 그 마음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좀 더 해보고 싶거나 안타깝다거나 슬프지 않다.
그리고 70대가 되어서도 엄마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딸로서 살 줄 알았는데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고, 내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싶은 7세 미만의 아이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너무너무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땡깡을 부렸는데 엄마는 그때마다 너, 저거 사달라고 한 번만 더 말하면 죽을 때까지 안 안아줄 거야, 라고 말했다.
내가 이렇게 어린데? 엄마가 나를 죽을 때까지 안 안아준다고?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때마다 여러번 물어봤지만 친절한 엄마는 어린 내가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게 그때마다 말씀해주셨다. 한번만 더 사달라고 말하면, 죽을 때까지 안 안아줄 거야, 라고.
숫자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어린이는 아니었지만, 사람은 100살까지 살고 엄마가 100살까지 살면 나도 70대쯤의 할머니가 될 텐데, 그 긴 기간 동안 엄마가 나를 안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세상이 다 아득해져서 나는 아무리 갖고 싶어도 더 이상 조를 수가 없었다.
너무 갖고 싶은데 엄마가 죽을 때까지 날 안 안아줄 상상을 하니 겁나서 조를 수가 없어서 팔이 덜덜 떨리는 걸 느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래도 엄마가 안아주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았던 때라 참았다.
누가 어린 아이가 참을성이 없다고 했는지, 나는 어릴 때 더 참을성이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 참을성을 다 써서 그런지 , 어릴 때 갖고 싶었던 마음을 너무 많이 참았더니 최근에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빚이 쌓일 걸 알면서도 사고 만다. 아무리 별 게 아니더라도.
어릴 때 안데르센의 '어머니 이야기'를 너무 인상깊게 읽었다. 그리스로마신화의 데메테르 이야기도 그렇고. '어머니 이야기'는 내가 아는 가장 심한 판타지 스토리이다.
엄마가 나를 낳았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기가 싫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를 예전처럼 죽을 만큼 사랑하지 않는 게 그렇게 몹쓸 짓이나 죄는 아니라고도 생각하기로 했다.
예전처럼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나를 발견하고 나서, 그냥 엄마는 그냥 나를 낳아준 한 여자로 인정하는 대신 엄마를 사랑하지는 않는 나를 생각하면 죄책감이 들었는데 내가 문제였다.
내가 엄마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엄마도 날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위대한 개츠비도 사실 데이지가 이기적인 게 문제가 아니었다. '혼자' 너무 심하게 좋아한 개츠비가 문제였다. 이제는 너무 좋아하고, 너무 좋아한다고 해서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방이 좋아해주길 바라는 그게, 욕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따뜻한 모녀 사이를 그린 이야기를 듣거나, 드라마에 그런 장면을 보거나, 아니면 문득 그냥 쓸쓸해지기도 하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죄책감이 들지는 않는다.
영원하지 않는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