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하는 것도 재능이다

애정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도 능력이고

by 시은

아는 동생의 친한 친구(=모르는 사람)가 프로듀스 101의 덕질을 한다. 얼마 전 순위 발표가 나던 날, 떨려서 친구들과 아예 방을 잡고 술을 마시며 그걸 시청했고, 그 동생이 투표한 아이돌은 떨어진 연습생이지만 콘서트가 따로 잡히자 그 티켓팅도 했다고 한다.


근데 그 아이돌을 위한 도시락 조공도 있고, 커피차 조공도 있다는데 그걸 못 해줬다고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다고, 아는 동생(=아는 사람)이 말했다.


나도 좋아하는 가수랑 배우가 있다. 하지만 그 가수의 음악 듣고, 그 배우의 드라마만 챙겨보는 정도지, 내가 뭘 안 해줬다고 죄책감을 느끼진 않는데 저 정도면 애정도 재능이고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클릭하는 속도가 빠르지 못한 사람은 치열한 콘서트의 경우, 아무리 돈 있고 시간 있어도 티켓 예매도 못 한다. 난 이걸 해보려다 몇 년 전에 이미 포기했다.


그것만 포기한 게 아니다. 심지어 늙어 죽을 때까지 포기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꿈인 시나리오 작가라는 직업도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아주 무난하게 포기했다. 이런 날이 오면 가슴 아플 줄 알았는데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진 않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클릭하는 속도도 고만고만한 나는 브라운관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들을 보는 것으로, 심지어 ‘매우’ 만족한다. 대신 좀 오래 반복해서 보기는 한다.


사진은 1년 전, 책상 앞에 붙여놓은 기사다. 예전에 대학교 친구가 드라마 스텝으로 일했기 때문에 작가가 되면 언젠가 그들의 입장을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을 꼭 쓰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작가가 되지 못해서 그럴 기회도 없이 그냥 생각에 그치고 말았다.


훗날, 전해 들은 얘기로는 드라마 스텝이던 그 친구가 그 일을 그만두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얼마 만에 그만뒀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친구가 그 업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것보다, 잘 했다고,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일이긴 하지만 내가 들은 그 친구의 근무조건은 상당히 열악했다. 어느 드라마였다고 콕 집어말할 수는 없지만 방영되면 최고의 시청률을 찍는 작가님의 작품에 함께 했다는 것 정도만 밝히겠다. 다행히 그런 작가님이 꽤 여러 명 있으니까.


출근은 7시로 기억한다. 나중에 자신보다 막내가 들어오면 더 늦어도 되는지는 모르겠다며 나중에 늦춰준다고 했다는데 내가 그와 연락할 당시엔 그랬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딱히 퇴근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근무조건이었다는 것이다.


월요일에 출근을 하면 퇴근은 거의 10시, 11시였는데 촬영 스튜디오가 일산에 있어서 자신이 거주하는 서울로 돌아가면 12시, 씻으면 1시라서 퇴근을 포기하고 남녀 분리만 된, 스텝들 숙소처럼 제공하는 숙박업소에서 잠을 때우고 다음날 바로 출근을 한다고 했다. 정식 방송국 직원이 아니라 외주를 받은 업체 소속이라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스텝은 외주업체 소속이 대부분이다.


집에 돌아오는 건 2주에 한번, 입었던 옷과 속옷 빨래 돌리고 다시 갈아입을 속옷을 가지고 오려고 집에 가는 것이라고 했다. 공동숙소다 보니 막내인

자신은 눈치 보여서 샤워도 제대로 못 하고 그렇게 한 일주일 일하면 자기 몸에 나는 냄새가 불쾌할까 봐 신경 쓰일 때도 있다고 했다. 스물일곱 남자가, 그렇게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일하고 받는 월급이 고작 150만 원이었다.

그 후로 얼마나 오래 했는지는 모른다. 아주 길지는 읺았지만. 그런 열악한 조건인데도 한동안 했다는 건, 그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을 거다. 사랑하는 일이어서, 견뎌보려고 했을 거다.


힘들어도 끝까지 하려고 했어도 응원했을 거지만, 이렇게까지 했었는데도 알아주지 않으면, 길이 보이지 않았다면 포기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그 잔인한 세계를 그 친구가 먼저 놓은 것이 결코 그가 나약해서는 아니었다고 그 포기함도 응원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버티다가 죽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근무조건에서 버티라고 하는, 저 매혹적이지만 잔인한 세계가 잘못된 거지, 그 친구가 나약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이 드라마 아니다. 이 작가님도 아니고. 그냥 10년전이나 지금이나 저 세계의 근무환경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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