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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식이와 학씨 아저씨 사이에서

남자들의 밥상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에 대하여

by 시은

<폭싹 속았수다>에 대한 코멘트와 리뷰가 sns에 넘쳐난다. 익명의 유저는 이런 글을 썼다.

아빠가 만약 <폭싹 속았수다>를 보았다면 자신이 어디에 더 가깝다고 생각할까.


나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모든 남자캐릭터가 아빠와 겹쳐 보였다. 저 사람도 아빠 같고, 이 사람도 아빠 같고, 저기 저 사람도 아빠 같았다.


너 하고 싶은 거 하라고, 아빠가 우리 딸 하고 싶은 거 다 해주겠다고 말하는 중년 양관식의 모습은, 나의 아빠가 10대, 20대 시절의 나에게 해준 응원의 말과 무척 닮아있었다.


그러다가도 아빠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날이면 니가 누구 덕에 쌀밥 먹고 사냐고, 내 덕에 쌀밥 먹고사는 주제에 어디서 말대꾸냐고 말 안 들을 거면 나가라고, 나가서 한번 배 쫄쫄 굶어서 밥 고마운 줄 알고 아버지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고, 내가 하라는 거 안 하고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 거면 당장 나가라고, 나가서 차라리 굶어 죽으라고 집요하게 몰아붙일 땐 학씨아저씨였다.



수능을 망쳐서 대학 1,2,3 지망 모두 예비합격이 되었을 때 재수하겠다는 내 말에, 여자 주제에 무슨 재수냐고, 어차피 시집가면 직장 때려치울 텐데 아예 대학 갈 필요 있냐고, 바로 공장 들어가서 돈이나 벌라고, 시집가면 남의 집안 식구 될 여자애한테(누가 들으면 친딸이 아닌 줄 알겠다. 친딸 맞다) 재수시켜 줄 돈은 없으니 재수하고 싶으면 니가 벌어서 가라며 무책임하게 말할 땐, 여자가 대학은 무슨 대학이냐고 공장 아니면 시집이나 가라고, 누가 도와줄 줄 아냐고 니 살길은 니가 찾아야 한다고 말하던 애순의 작은 아버지 같았다.



다정한 모습, 난폭한 모습, 양육의 책임에서 최대한 멀어지려고 애쓰는 모습, 세 가지 모습 모두 다 내 아버지 안에 있었다.




언젠가 남동생이 유흥과 향락에 빠져서 몇 천만 원대 빚을 졌을 때, 엄마는 그 빚을 나에게 갚으라고, 매달 얼마라도 내 월급을 떼서 보태라고 했다. 아들 빚은 원래 가족이 다 같이 갚아야 하지 않겠냐면서(네? 갑자기요?).


사실 엄마는 그동안 몰래 동생의 빚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에서 갚고 있었던 듯했다. 하지만 한계가

온 듯했다. 동생이 친 사고를 끝내 수습하지 못해 결국 나에게까지 손을 벌리는 엄마를 위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빈 말로라도 돈을 같이 갚아줄 생각이 없었다. 내가 그 빚을 대신 갚아줄 정도의 여력이 되지도 않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걔 빚은, 걔가 갚아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동생의 빚을 갚아주다가, 더 이상 도와줄 돈도 없고, 밑 빠진 독이 된 동생을 자신이 건사하기 버거워 나를 달달 볶는 엄마 옆에서 아빠는 내 편도, 엄마 편도 들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부디 이 상황이 어떻게든 해결되길 바라는 듯했다. 그렇게 입만 꾹 다물고 있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아빠는 말마따나 ‘소 죽은 귀신이 쓰인 것처럼’ 말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양관식 같은데, 절대 양관식이 아니었다.




가부장제 문화,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집안에서는 여자와 남자가 밥을 따로 먹는다. 할아버지가 제주 출신, 할머니가 제주 해녀 출신인 우리 집안은 오랫동안 밥을 따로 먹는 집안이었다.


밥을 따로 먹는다는 것은 남자는 남자끼리만 대화하고(사실 남자끼리 별로 대화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물론 우리 집안만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여자는 여자끼리만 대화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되게 만든다. 아내가 밥을 먹다가 남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라 치면 남자 쪽 밥상에서 어허 밥이나 먹지 무슨 대화인가 냐는 뉘앙스의 핀잔이 터져 나온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말을 할 수 없다. 대화를 하고 눈빛을 마주하면 안 되는, 무슨 국법이라도 깬 것 같은 사람이 되는 사회적 시선이 쏟아지게 만든다.


우리 집안도 제사 때면 여자와 남자가 밥을 따로 먹었던 시기가 있었다. 어느 날, 삼촌이었나 작은 아버지였나, 누군가가 이렇게 밥 먹는 것 좀 그만하자고 강경하게 말해서 모두 다 같이 밥을 먹게 되긴 했지만 초등학생 정도 때까지는 남녀분리해서 밥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밥을 따로 먹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가, 내 밥상 말고 다른 밥상에 있는 사람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사건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간 사건이었다.


명절이었나 제사였나. 온 친척들이 모인 자리, 남녀가 따로 식사를 하는 동안, 어쨌든 모두가 그냥 밥이라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면 그날의 식사자리가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모두 편하게 밥을 먹긴 했다. 딱 한 사람, 엄마만 빼고.


할아버지가 ‘물’ 할 때마다, 작은 아버지가 ‘혹시 이거 반찬 좀 더 먹을 수 있을까요?’ 할 때마다 고모할아버지가 ‘숭늉 먹고 싶다’할 때마다 맏며느리였던 엄마는 차분히 앉아 밥을 먹을 새도 없이 다시 주방과 안방을 오가야 했다. 식사를 차리느라, 국과 밥과 반찬을 나르느라,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식사 뒤치다꺼리는 곧장 시작되었다. 엄마는 그날 밥 한 숟갈 입에 제대로 넣지 않았다. 아니, 넣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생이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엄마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소리 계속 나는데 아무도 모르고, 나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


동생도 나처럼 엄마가 무슨 스프링 의자에 앉은 사람처럼 1분이 멀다 하고 1번씩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던 것이다.


모든 뒤치다꺼리가 끝났을 때, 당연히 식사는 거의 끝나 있었고 엄마는 밥 한 술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식사자리가 끝났다. 그리고 그날 엄마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손 씻기가 무섭게 밥을 차려 먹었다.


양푼에 밥을 비벼 먹는 엄마를 보고 아빠가 티 없이 웃으며 말했다.


“자기야~ 밥이 또 들어가나? 그렇게 먹고도 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나와 남동생의 눈이 마주쳤다. 아빠는 남자들의 밥상에서 자신의 밥을 먹느라 엄마가 밥을 먹었는지 말았는지도 몰랐던 것이다. 아빠는 그날 밥을 2공기 먹었으면서.


<폭삭 속았수다>에서 애순이 관식의 집에서 시집살이를 할 때도 남자와 여자는 밥을 따로 먹는다. 관식은 자신의 원가족에게 무시를 당하는 자신의 아내, 그리고 자식의 얼굴을 보며 밥을 먹고자 ‘남자들의 밥상’에서 등을 돌렸다.


이후 이어지는 딸 금명의 내레이션을 통해, 그날 관식의 등돌림이 얼마나 큰 행동이었는지 가만히 알려준다.



그 등돌림은 관식에게도 크나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말이 조롱거리가 아니지만, 드라마 속 배경인 1970년대 초, ‘아내밖에 모르는 등신’, ‘아내팔불출’은 아내를 아끼는 남자를 조롱하는 말이자 그 남자를 비하하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체감하기로는 한 1990년대까지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아내를 아끼는 건 썩 좋은 행동이 아니라고, 별로인 행동이라고 은유적으로 비난하기 위해서. 아닌 게 아니라 10여 년 전만 해도 ‘남자들의 적은 최수종’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진지하게 최수종이 작작하길 바라는 뉘앙스가 짙게 깔려 있었다. 최수종 때문에 여자들의 남편 기준이 높아진다는, 뭐 그런 이유로.


그래서 처음엔 아내를 아끼던 남자들이 주변 소음에 휩쓸리고, 끊임없는 가족들의 비난으로 세뇌당해서 ‘아내를 아끼는 것을 티 내면 남자답지 못한 남자가 되는 걸까 봐 ‘ ’남자들의 밥상’에서 놀림받을까 봐 결국 아내의 고통을 외면하는 남자로 대거 변하던 시대가 있었다.


다행히 현실과 다르게 드라마 속에서는 관식이를 놀리거나 압박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거의 없다.


과연 아빠가 관식이 같은 남편이었을까. 아빠의 말만 들으면 저런 사랑꾼이 따로 있나 싶을 정도였다. 비록 공수표일 뿐이었지만 아빠는 틈만 나면 엄마에게 내가 자기를 얼마나 아끼는지 아느냐고, 자기도 진짜 잘하고 싶다고, 로또 되면 고생 안 시키고 모시고 살 거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나에게처럼 밥 굶어야 정신 차린다느니, 누구 덕에 밥 안 굶고 사는 줄 아느냐는 식의 혈압을 오르게 하는 말도 엄마에게는 한 적이 없었다.


아빠는 자신을 양관식 같다고 생각할까. 무엇보다 엄마는 아빠를 어떻게 생각할까. 양관식일까, 학씨 아저씨일까.


하지만 엄마도 오애순처럼 평생 저 날을 잊지 못할 것이다. 집에 오자마자 밥을 먹고 싶을 정도로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시집에 구체적으로 헌신한 자신을 몰라주는, 40년째 로또 되면 호강시켜 주겠다고 공수표를 남발하는 짝꿍의 천진한 무관심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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