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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은 Aug 23. 2019

향연(feat. 자본주의)

공덕동 전집에서

얼마 전 대학 사진동아리 친구들을 만났다. 햇수로는 16년 된 사이지만, 그렇게 자주 만나고 엄청 친했던 사이는 또 아니었던 거 같다. 동아리 방에서 매일 마주치고 인사하긴 했지만.


그때도 나는 빨리 작가가 되고 싶어서, 말하자면 글을 써서 밥벌이를 하고 싶어서 동아리가 됐든 과 사람들이 됐든 인간관계를 잘 챙겨야 된다고 하는 주변의 말을 그리 귀담아 듣지도, 실천하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누가 술 먹자고 불러도 잘 안 갔다는 뜻이다.


지금 생각해도 꼭 술자리 자체가 인간관계를 반드시 돈독하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뭔가 내가 상상하던 대학이 아니라는 세상 물정 모르는 생각이 어느 순간 내 마음을 장악해버렸다.


내가 중고등학생때 인기 있었던 남자셋여자셋과 논스톱이라는 캠퍼스시트콤이 원인이었다.


똑같지야 않겠지만 대학이 그 시트콤들 같은, 조금이라도 그 비슷한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 환상이 깨진 것도 좀 컸고 배우는 것도 생각보다 흥미롭지 않자 내가 상상한 대학과 현실의 진짜 대학의 갭이 너무 커서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영상매스컴학부라고 입학했는데 맨날 토익공부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1년만에 휴학을 해버렸다. 동아리 친구들 중 여자애들은 나처럼 휴학을 많이 해서, 남자애들은 군대를 가거나, 자퇴를 하고 다른 학교로 간 애도 있어서 다들 먹고 살기 바쁘기도 했고 친밀하게 자주 연락하고 지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며칠 전 오후3시쯤 1학년때 사직구장 출사때 찍은 동아리 단체 사진이 한장 오더니 여기 너도 있었네 하고 톡이 왔다. 정말 구석탱이에 눈곱만하게 있었다. 갑자기 이 사진은 왜 보낸 거냐고 했더니 퇴근하고 공덕동 어디로 오라고 지도가 왔다.


부산 사는 애 두 명이 서울에 놀러온 김에 오늘 어디에서 몇시에 다 같이 보자는 거였다. 언제 또 보겠나 싶어 퇴근하고 갔더니 친구들 중 한 명이 니가 쓴 시나리오는 언제 영화로 볼 수 있는 거냐고 반은 푸념, 반은 장난처럼 물어봤다. 나를 만나기 전 친구들은 좀 일찍 만나서 1차로 술을 먹고 자리를 새로 옮긴 상태였다.


예전 같으면 조금은 창피하고 가슴 아팠을 질문이었을 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무렇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몇 년 만에 본 고향 친구들이고 내가 시나리오 작가 되고 싶어서 서울 올라온 거 뻔히 아는 친구들이었다.


서울 올라가기 전에 모여서 술 사주면서 나한테 꼭 성공하라고 덕담을 해준 친구들이었다. 그런 친구들한테 보자마자, 응, 사실 나 시나리오 작가 되는 거 포기했어, 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포장을  좀 해서라도 말하려고 했는데 사실 내 대답이 꼭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지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그건 그렇고 넌 자본주의의 노예인 거 같냐고 질문을 던졌다. 내 작품 영화로 볼 수 있냐고 질문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잠깐 얼이 빠져있다가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있는데 아닐 수 없지 않겠냐고 대답했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럼, 너 백억 준다고 하면 소주병 먹을 수 있어?

-갑자기? 소주병을?

-응.


당연히 못 먹는다고 했다. 먹다 죽을지도 모르고 내가 이걸 먹는다고 누가 왜 나에게 백억을 주겠느냐고 말했더니 그 친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먹어야 자본주의 노예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보고 자격을 상실했다면서 똑같은 질문을 다른 친구에게 했다. 내 꿈에 대해 했던 질문은 대충 넘어가고 이 질문은 왜 이렇게 집요하게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 닌 어쩔 건데?

-씹어먹어야 돼?

-당연하지! 백억인데.


미친 걸까? 아무도 누군가 소주병을 씹어먹는다고 해서 백억을 줄 사람은 없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36살 먹은 남자들이 이걸 주제로 지금 진지했다.


-너희, 이 얘기 왜 해? 니가 소주병 씹어먹어도 누가 백억 안 줘.

-좀 가만있어봐. 생각 좀 해보게. 야, 근데 이거 1년안에만 먹어도 쳐주는 거야?

-백억인데 무슨. 1시간 안에 먹어야지, 목이 찢어지든 말든 피가 콸콸 나든 말든.

-혹시 갈아서 마셔도 돼?

-안 되지, 백억인데. 백억이면 씹어먹어야 예의지.

-에이. 그럼 못 먹지.


아니, 당연히 못 먹고 아무도 백억 안 줄 일인데 이 주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게 너무 말도 안 되고 신기하고 신선했다.


나보고 빠지라고 하더니 비슷한 진행방식으로 그 두 명은 대화를 계속했다. 이번엔 숟가락이면 오억인데 먹을 거냐고 질문이 던져졌다. 잘라서 먹어도 되는지, 이건 기간은 언제까지 가능한지 또 다시 옵션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더니 결국 안 먹기로 하고 이 대화가 끝났는데 처음 소주병 씹어먹을 수 있냐는 얘기를 꺼낸 친구가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다 이렇게 된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해보려는 생각을 계속 한다니까, 자본주의 노예들은? 마, 니는 노예다 인마. 이렇게 나와줘야 자본주의 노예인 거야. 그리고 시은이 니는 땡, 이성적으로 접근하면 안 되는 질문인데 진지했기 때문에 노예 탈락.


공모전에서도 수없이 탈락했는데 자본주의 노예에서도 탈락이었다.


그건 그렇고 내가 탈락이면 이것저것 질문 계속해서 던진 친구는 합격이라는 건데 뭐가 이렇게 안 부럽냐.


이 친구들 만난 날에 찍은 건 아니지만 서울에 와서 글 쓴답시고 이곳저곳 구경하지는 못했다. 6년 반 만에 처음으로 본 서울 야경. 응봉산인데 정말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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