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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세요

다들 한 번씩은 가지는 건데

by 시은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조지 버나드 쇼가 한 개소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앤디 워홀이 말한 것처럼, 일단 유명해지고 나면 똥을 싸도 사람들이 우러러봐야 될 것 같은 맥락의 말이다.


개똥 같은 소리.


이 말의 어느 부분이 정확히 어떻게, 나의 싫음을 유발하는지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능력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말을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싫었다.


지금도 엄청 똑똑해진 건 아니지만 손톱만큼이나마 성장한 통찰력으로 저 말에 대해 반박하자면, 저 말을 한 사람 역시 젊음을 소유해 본 적이 있었다. 자연의 법칙상, 없었을 리가 없다.


프로메테우스가 신을 속여서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것처럼, 젊은이들만 따로 불러서 몰래 누가 선물처럼 주었기 때문에 그들만 따로 재산처럼 젊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젊음을 소유한 어느 누구도 그걸 영원히 소유할 수가 없다.


그러니 조지, 니가 준 것도 아니면서 딱히 아까워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라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젊음은, 그쪽이 노력해서 우리에게 준 것도, 우리가 누구한테 뺏은 것도 아니란 말이다.


내 젊음은, 혹은 누군가의 젊음은 그걸 아까워해주는 그 사람이 준 게 아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에게 할 말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누군가의 젊음을, 그 젊음을 위해 노력해준 것도 보태준 것도 없는 누군가가 아까워한다는 게 불쾌하다. 그것이 꼭 나의 젊음이 아니더라도.


젊은이들을 보며 혀를 차는 누군가 역시 한 때 분명히 충분히 가졌던 것이다.

젊음은 젊은이들의 독점물이 아니다.

현재에도, 과거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마찬가지다.


아무렇게나 허비하든 소중히 사용하든 그 젊음의 권리는 그 자신에게 있다. 벤자민 버튼 아니고서는 누구나 가졌던 것이다. 그는 늙음을 먼저 가졌지만.


삶이 주어진 모든 늙은 사람은 젊음을 가져본 적이 있다.

하지만, 삶이 주어진 모든 젊은이가 늙음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시인 윤동주가 형무소에서 약해지다 약해지다 사망한 나이는 28세였고,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이 영양실조로 방구석에서 굶어죽은 나이는 31세였다. 반 고흐는 37세에 죽었다.


그들은 젊음을 가졌고, 그 채로 죽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늙음을 가져보지 못했고 그건 앞으로도 영원히 그걸 갖지 못할 거라는 말이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젊음이란 게 그렇게나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고, 그 끝에 있는 것을 가질 수 있는지 여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나의 늙음도 내 잘못으로 벋은 벌이 아니다, 라는 <은교> 속 문장이 명문장인 것처럼 떠돌고 있는 걸 보니 화가 난다.


이 약하고 순간적일 수 밖에 없는 젊음을, 우린 지금 겨우 그거 하나 갖고 있는데 그걸 질투하는, 한때 젊은이였을 사람들의 속 좁은 마음이 너무나 순간 치사해보이고 불편해져서 결국 돌아가신 버나드 쇼 씨 이야기까지 나와버렸다.


폭풍이 와서 밖에 못 나가니 술을 평소보다 조금은 더 마시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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