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지나가겠지만
여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생각보다 편한 것이 긴머리이다.
말리는 품이 좀 들긴 해도 말리기만 하면 딱히 스타일링에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다. 그게 끝이다.
올해 초에 시나리오공모전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던 중에 긴 머리를 잘랐다. 거의 똑단발 정도로.
그 시나리오 공모전 수업은 6년 반 전 내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들었던 시나리오 수업의 선생님이었다.
가격 대비 피드백이 좋아서 몇 년 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아마 그렇게 짧은 머리를 처음 보셔서 그랬는지 갑자기 머리를 짧게 자른 것에 대해 심기일전하기 위한 것이냐며 꼭 좋은 시나리오 완성하길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그냥 잘랐다, 거의 아무 생각 없이.
긴머리가 귀찮다는 생각도 없었다. 원래 남들이 보기에 귀찮아 보여도 당사자에게 습관이 되면 그냥 일상의 일부다. 작가들이 자기가 쓴 글 고치고 또 고치고 그렇게 수십 번 고치면서도 별로 지겹다 생각 못 하는 것처럼.
꽤 길었기 때문인지 미용실 디자이너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거냐고 묻기도 했지만 전 남자 친구와 헤어진 게 1년 반 전인데 그것 때문에 자른 건 아닌 거 같다.
맥락과 상관없지만 내가 과분해서 헤어지길 잘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두세 달 뒤 한번 더 자르면서 앞머리까지 잘라서 애봉이 머리가 됐다가 지금 다시 기르는 중인데 지금 이 순간, 내 머리는 거지존을 통과하고 있다. 목표는 중단발이다.
뭘 해도 어중간한 길이. 뭘 해도 그닥 안 예쁜 느낌. 그렇다고 자르면 계속 무한 루프일 수 밖에 없다.
단발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니 거지 존을 경험해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어중간한 머리를 보니 심란하다.
그래도 지나가겠지.
어중간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머리도, 어중간해서 가끔 내가 쓴 글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