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널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건너 건너서 이긴 해도 연기를 하는 사람들도 종종 만날 일이 있었다.
작가 지망생이 만나는 연기 하는 사람들은 연기 지망생은 아니다. 이미 연기를 하고 있기는 하다.
작은 무대 거나 아주 작은 무대 거나, 아주아주 작은 무대 거나.
제대로 된 페이가 지불되지 않는 무대도 많기 때문에 생각보다 연기의 세계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 세계의 매력에 빠지면 거기서 자기 자리를 갖고 싶어 지기 때문에 빠져나오기 힘들기 때문에 문제다. 재능에 상관없이. 간혹 위험하게 생계에도 상관없이.
영화에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아주 작은 규모의 영화, 검색하면 나오지는 않는 영화였지만 어쨌든 촬영은 다 되었고 우리가 들어도 잘 모르지만 어딘가 영화제에 출품하기는 한 영화들이라고 했다.
이미 실전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부럽지는 않았다.
그들이 흔히 비유하는 말처럼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그들의 삶은, 가까이서 보니 소위 말하는 자신의 꿈만을 위해 사는 낭만적으로 보이는 삶이긴 하지만, 낭만이라는 이불로 덮기에는 열악한 현실이 너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대부분의 직업군이 모 아니면 도인 분야가 많지만 대중예술 관련 직업 중에서도 연기 쪽 분야가 가장 심할 것 같다. 개인적 생각이다.
내가 세상의 수많은 직업의 세계를 다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누가, IT가 더 심하다, 법조계, 혹은 금융 관련 직업이 더 심하다,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냥 내가 몸을 담그고 싶어 했던 세계 안에서는 그래 보였다.
그중에 '세상이 나를 너무 몰라준다'는 말을 달고 사는 연기자를 한 명 알게 되었다.
그때 그 연기자 나이가 20대 초반이었으니 지금 20대 중반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그 자리에서 한참 어리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모인 사람들이 작가 지망생이 많은 자리였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딱히 그런 이유가 없이 술에 취하면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한 노력의 에피소드를 줄줄 읊는데 사실 생각보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연기자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지려고 하는 직업에 노력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회계사가 목표인 사람은 남들은 봐도 봐도 모르는 회계 공부 머리 터지게 하는 것처럼, 요즘은 다 열심히 산다. 재미없어 보이는 직업일지라도. 쓰고 보니 직업이라는 거 자체가 원래 재미있자고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요즘 노는 것처럼 보이는 직업군이나, 거저 돈을 버는 것 같거나 혹은 쉽게 돈 버는 것처럼 보이는 영 앤 리치한 사람들이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어서 그런지, 자기가 하는 일을 엄청 대단한 노력처럼 여기고 남들도 그래 주길 바라는 치기 어린 배우였다. 자신이 얼마나 섬세하며 감수성이 풍부한지까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는데 스스로는 안쓰럽게 여길지 몰라도 그냥 내 눈엔 꿈 많은 어린애가 칭얼대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도 진정한 작가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정의하기 쉽지 않고 진정한 연기자가 이런 것이다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그 연기자는 아니었다. 남을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되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모인 사람들 중엔 작가 지망생으로 산 지 15년 넘은 사람도 있었고, 젊은 시절 공모전 당선이 돼서 데뷔를 했는데 왠지 자기 재능이 대단한 게 아닐까 두려워져서 다른 일을 하고 지내다가 도저히 작가의 길을 포기 못 해서 다시 작가를 하려고 보니 이제 그 길이 막힌 사람도 있고, 여하튼 다 우여곡절이 많은 데다 대부분 작가 지망생들이 지망생으로 산 기간은 생각보다 꽤 길기 때문에 그 연기자 지망생이 부리는 엄살이 솔직히 어이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대단한 문제였을지 몰라도.
다들 적극적인 동의는 해주지 않은 채 그래도 꽤 묵묵히 그의 엄살을 들어주고 있는데 갑자기 나를 딱 지목해서 물었다.
-누나, 진짜 너무 하지 않아요? 이렇게까지 세상이 저를 몰라주는 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이, 왜 하필 나한테.. 라는 것이다.
어렸을 때 내 생각을 얘기했다가 혼난 적이 많았기 때문에 숨기고 싶은 개인적인 생각이 있으면 누가 그에 관한 걸 물으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거나 잘 모른다고 하거나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막다른 구석에 몰리면 나를 지키기 위해서 긴 하지만 어쨌든 보편적인 생각 같아 보이는, 하나마나한 말을 하곤 했다. 서른이 가까워지면서부터인지, 아니면 독립을 하고 나서 무렵부터 딱히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면서 무례하지 않는 선에서 그냥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야, 세상은 나도 몰라.
너만 모르는 것 같니, 세상이? 세상은 이 언니도 몰라. 저 친구도 몰라.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자기 하고 싶은 일 직업으로 갖고 싶어 노력하느라 10년 넘게 자기 시간 쓴 사람들이야. 그러느라 돈도 제대로 못 벌고. 세상은 그거 몰라. 근데 너라고 꼭 세상이 알아줘야 되니?
네가 무슨 우주의 중심이니?라고까지 묻고 싶었지만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이 차이가 제일 적어 자신을 잘 이해할 것이라 생각해서 나를 고른 것이겠지만 잘못 고른 셈이었다. 잠시 미안해질 뻔했으나 그 연기자는 자기가 얼마나 연기에 대한 애정이 많으며 그에 대한 노력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또다시 항변하듯 웅얼거렸다. 그 웅얼거림을 듣고 있자니 잠시나마 미안해한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신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거기 있는 누구도 크게 대단치 않다고 생각한 그 노력들. 노력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정도도 안 하고 뭔가 얻겠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도둑놈 심보 같은 정도의 노력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연기에 대한 애정, 그에 대한 노력도 중요하겠지만 적어도 직업군이 직업군인만큼 다이어트는 좀 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귀엽게 통통한 배우도 물론 있고, 연기해야 할 캐릭터를 위해 살을 찌우는 일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을 떠나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이상적인 외모라는 게 있다. 배우라면 더욱더.
배우로서, 어쩌면 최소한의 노력일 수 있는 외모조차 일반인 수준에서 봐도 한참 미달이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비난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옷조차 후줄근했다. 아니 , 후줄근해도 뭔가 일부러 후줄근하게 입은 것 같은, 센스 있는 느낌이라는 게 있는 사람도 있다. 그 연기자는 아니었다. 외모도, 옷 입는 센스도 없었다. 연기를 뭘 얼마나 미친 듯이 잘할지는 모르겠는 그 배우의 꿈은 한국이 아닌 헐리우드에서 연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누군가 너 근데 영어는 잘 하냐고 물어보자, 그건 그때 가서 배우면 된다고 말했다.
과연 세상이 널 몰라주는 걸까. 널 몰라주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