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입원하시게 됐어.’
아버지의 진료 예정 시간이 한 시간쯤 지나자 오빠가 남매들 단톡 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입원....... 입원이라......
입원.
우리 집에서 아픈 건 대부분 엄마 몫이었다. 타고나게 이가 좋지 않으셔서 이미 50대부터 틀니를 시작하셨고, 환갑이 되기도 전에 디스크 수술, 일흔을 넘기고서는 무릎 인공관절 수술, 그리고 수술 사이사이 잘게 잘게 병원을 많이도 다니셨다.
엄마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젊어서 고생을 그렇게나 하셨다고. 평생을 공무원 생활을 하신 아버지의 아내는 집안의 일꾼이었다. 천성이 부지런한 엄마는 아이를 다섯이나 낳아 키우면서도 집에 그저 있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면사무소에서 일하실 때는 동네 논밭을 사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우고, 하숙을 치고, 아버지가 시청에서 일하시게 되면서 시내로 이사 와서는 있던 논밭에 소작을 주고 농작물 유통을 하셨다. 대가를 바라고 하신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주변에 사람들도 많아 동네 사람들 중매를 서고, 부동산 거래를 소개하고, 그러면서 논도 늘리고 밭도 늘리고 점포도 사고 집도 짓고. 평생 제대로 판 명함 하나 없이 사신 인생이지만 평생 안 해본 일 없이 사신 인생이었다.
그렇게 평생 엄마는 당신을 갈아 넣어 공무원 월급쟁이 집안으로는 과분한 재산을 일궈냈지만 환갑 즈음을 기념한 단체 여행에서 아버지의 엄마냐는 소릴 들어야 했고, 칠순 여행에서 아버지는 엄마의 여행용 휠체어를 미셨다. 그래도 아픈 엄마 옆에는 항상 아버지가 엄마의 손발이었다. 병원행, 시장행 운전기사는 물론이요, 엄마의 입원 간병도 아버지의 몫이었다. 그게 당신이 바깥일을 하는 동안 집안일을 짊어지고 훌쩍 늙어버린 아내에 대한 사죄였을지도 위로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입원을 해서 정밀 검사 한 다음에 수술을 할지 안 할지 결정해야 된데. 그런데 다행히 오늘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됐어.’
오빠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궁금한 건 수천 가지지만 입원 수속을 밟으며 정신없을 오빠에게, 옆에 아버지를 세워두고 있을 오빠에게, 그러면서 엄마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소식을 전해야 하는 오빠에게 전화를 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저자의 의도가 ‘다행히’에 있는 건지 ‘입원’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메시지를 노려 보며 읽고 또 읽었다.
아버지는 ‘다행히’ 진료받은 그 날 정밀검사를 위해 바로 입원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입원 수속이 끝나도 코로나 검사 양성 판정이 나와야만 입실할 수 있어 밤 9시나 되어서야 대기가 풀리고 침대에 몸을 뉘이셨다. 새벽부터 움직이셔서 얼마나 진이 빠지셨을까 싶었는데 전화로 넘어오는 목소리는 되려 밝았다. 아까 오후에 기차역에서 만나기로 해놓고 왜 아직 서울에 계시냐고, 기다렸지 않냐고 농을 쳤더니 아버지는 웃으시면서,
“아유, 나도 몰라, 여기 있으라네.”
나도 따라 웃으며 이왕 계시는 거 검사 잘 받고 오시라고, 오실 때까지 기차역에서 기다리겠다고 하고 끊었는데, 아버지의 ‘나도 몰라’가 진심일까 봐 겁이 났다.
전화를 끊으며 꽉 쥐고 있던 눈물샘도 놓아주었다. 이제는 흐르는지도 모르게 그냥 흘러내리고 있다. 도대체 나를 압도하는 이 규모의, 이 깊이의 슬픔과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원래 항상 거기 있던 게 터져 나온 걸까, 아니면 하루하루 더 만들어지는 걸까. 거기 있는지도 몰랐는데, 내가 이만큼의 아픔에 대면할 수 있는지도 몰랐는데, 언제부터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걸까.
‘너, 이 정도 효녀 아니잖아. 니가 언제부터 아버지한테 그렇게 애틋했다고? 지금 당장 돌아가신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왜 이렇게 유난인 건데?’ 하며 나를 다그치고 눈물을 끊어내려 하자마자 짐승 같은 오열이 또 터져 나왔다.
오늘 새벽에 기차를 태워드리며 그랬단 말이다.
“아버지, 오빠가 이따 돌아오시는 기차도 예약해뒀어요. 이따 제가 마중 나올 거예요. 걱정 마시고 진료 잘 받고 오세요.”
그저 오늘 아버지가 타지 못한 기차가 생각나서 나오는 눈물일 테다. 타지 못한 기차가 오늘이기만 바라는 마음으로 흘리는 눈물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