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음.... 좀.. 생각한 것보다.. 좀 더 기억이... 없으신 것 같아.... 아주 긍정적인 상황은... 아닌 것 같아”
오빠가 말을 고르고 있다. 조심하고 있다. 망설이고 있다. 뭘 더 알고 있는 걸까. 병원에 지인도 있고 하니 더 들은 게 있는 걸까. 왜 말을 고르지? 내가 놀랄까 봐? 아니면 일단 최악의 상황 카드를 꺼내 들려고 밑밥을 까는 건가? 니가 왜? 니가 의사야? 왜 니가 말을 골라? 아는 대로 다 얘기해! 다 말하라고! 마음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오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둘째가 소띠로 태어난다는 얘기를 하다가 우리 집에 소띠가 있나, 하는 얘기를 하는데 잘 모르시더라고. 한참을 망설이시더라고. 아버지가.. 그걸... ”
영민하신 아버지가 기억을 헤매는 모습은 오빠에게 충격이었을 테다.
아버지는 길게 배우지 못하셨다. 다 같이 어렵던 시절 유독 가난하게 자라진 않으셨지만 까까머리 시절 날아온 태풍은 아버지 집을 날려버렸고, 그 길로 아버지는 못을 나르고 나무를 지며 집을 다시 지어내야 했다. 그때도 그 후에도 아버지에게 학교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났다. 당장 머리 위에 지붕이 없어진 그때, 그리고 일단은 배워야 하는 장남의 부재를 채워야 했던 그 시절, 둘째 아들이었던 아버지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배움은 길지 않아도 타고난 영민함은 어디서든 빛이 났다. 학교 다닐 적 친 시험은 한결같이 일등이었고, 학교를 못 가게 된 후에는 산에서 나무를 지어도, 밭일을 해도 항상 무리 중에서 제일 빠르고 제일 효율적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전체를 보고 기승전결을 잡아낼 줄 아셨고, 그 능력은 타고난 것이었다.
날려 보낸 집도 다시 살리고 잘 다듬어 둔 논 밭에서는 몇 해 째 풍년을 기대할 때 즈음, 산에서 지고 내려온 땔감이 뒷마당을 가득 채울 때 즈음, 아버지에게 학생 시절 친했던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세 번 만에 면서기 시험에 합격을 했다며 자기가 공부하던 책을 아버지 손에 쥐어 주고 갔다. 너라면 한 번에 붙을 거라고.
오랜만에 펼친 책 속 활자는 잊고 지냈던 까까머리 시절 두근거림을 살려냈다. 그렇게 친구의 손때가 묻은 책을 석 달쯤 파보다 덜컥 시험을 치르러 바닷가 도시로 가는 버스를 잡아 탔다. 고사장 인근에는 건너 건너 알던 할아버지의 지인이 계셨고, 시험 전 날 하룻밤 재워주기로 해 신세를 지기로 했다. 집에 가보니 신세를 질 수험생은 아버지만이 아니었다. 서너 살쯤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들은 바닷가에 왔으니 회를 먹어야 하지 않겠냐고 저녁으로 물회를 먹으러 가자 했다. 스무 살을 넘겨도 물회는커녕 회도 먹어본 적도 없었던 아버지는 고기같이 쫄깃한 식감의 물회를 맛보고는 단박에 반해버렸다. 하지만 혀에서 맛있었던 그 녀석은 뱃속에서 배신을 했고 같이 먹은 형들이 멀쩡할 때 아버지는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초췌한 얼굴로 떨리는 손으로 첫 시험을 치렀고 멀쩡하던 형들을 제치고 혼자 합격했다.
“형이 많이 위험할 수 있다고...”
‘형? 누구? 그 같은 병원에 일한다는 그 형? 그 형이 뭘 알아? 신경외과도 아니잖아! 지가 수술할 거야? 왜 가타부타 말을 붙여? 안 열어보고 위험할지 안 할지 사진만 보고 안대? 지가 사진을 봤대? 아직 정밀검사도 안 끝났는데 뭘 그렇게 분석을 했대? 지가 화타야? 지가 그렇게 잘났대? 척 보면 딱 안대? 뭐가 그렇게 잘났대? 뭘 그렇게 다 안대?’
다른 누군가를 원망할 수 있다면, 더 화낼 수 있는 대상을 찾으면 아버지의 암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것마냥, 마치 그렇게 될 수 있을것마냥 내 머릿속은 더 화 낼 거리를 찾아내려 분주해졌다. 지금 당장 아버지의 암보다 더 큰 적을 찾아내야 해. 그래야 해. 지금 당장. 지금 당장 생각해 내야 해. 지금. 단전 가득 끓어오르는 분노를 뱉어낼 곳을 찾아 눈을 희번덕이며 두리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