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벽에 틈을 낼 때는 눈물이 필요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민폐는 끼치지 말자인데요. 오늘 여러분에게 가장 민폐를 끼친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힘드네요."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일 년 동안의 일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속마음을 이야기하며 눈가에 눈물이 차 올랐다. 울며 할 말이 아닌데도 나는 또 눈물 섞인 발표를 했다.
나는 왜 나의 마음속 이야기를 할 때면 우는 걸까?
나는 장녀이다. 내 밑으로 세 살 밑 남동생, 일곱 살 차이 나는 여동생, 무려 열 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 있다. 부모님은 '네가 맏이니까.'라며 나를 죄여온 적이 없는데, 나는 스스로 'K장녀'에 걸맞은 삶을 살아왔다.
눈치가 빠르다.
선택하는 것이 어렵다.
남의 인정을 바란다.
취향이 없는 편이다.
착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속마음(진짜 원하는 것)을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 분명히 하기 싫지만 말이다.
누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편하다. 시키는 일은 웬만하면 한다.
자신이 한 일이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여긴다.
책임감이 남다르다. 책임감 있게 일을 마쳐 놓으므로 누군가 일을 믿고 일을 맡긴다.
집안 걱정을 많이 한다. 집안의 경제 사정을 잘 알고 있다. 집안 걱정에 내 삶을 포기할 때가 있다.
"나는 다 괜찮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며 선택 기회를 양보한다. 먼저 좋아하는 것을 밝히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K장녀'라는 말에는 이런 의미들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어린 시절은 '나'보다는 '가족'이 바라는 '나'로, 어른이 되어서는 사회에서 만나는 '남'이 바라는 '나'에 최대한 맞춰서 살아가는 집안의 맏이들. 애석하게도 위에서 나열한 삶의 모습은 내가 나의 삶의 모습을 적어본 것이다.
아버지는 많이 엄했다. 특히 식당에서 조금만 떠들거나 음식을 지저분하게 먹으면 눈빛만으로도 혼을 내셨다. 식당에서 예절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아버지 밑에서, 아버지의 눈빛이 날카롭게 짙어지기 전에, 아니 날카로워지지 않게 차분하게 밥을 먹는 아이가 나였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 표정, 친구들 표정, 사람들이 존재하는 공간의 싸한 분위기 등을 빨리 알아차렸고, 어느새 눈치 보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동생들이 눈치 없이 떠들 때면, 아버지에게 일어나는 묘한 화남을 일찌감치 알아차려 얼른 바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눈치 없이 떠드는 동생들 덕에 늘 함께 혼이 났다. '나는 잘하고 있었는데요.'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내리누르며 말이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어려운 집안 사정이 눈에 보였다. 어른들끼리 하는 말의 이해도가 높았던 탓일까. 어른들이 오가며 하는 말을 잘 들었고, 잘 이해했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이 집안의 어려운 일을 논하는 이야기를 너무 잘 이해해 버렸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피아노 학원을 다녔고, 피아노 치는 것을 참 좋아했다. 성당에서 성가 반주자로서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내 삶에 뿌듯한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부모님께서 어린 동생들까지 챙기는 것이 버겁다는 걸 느끼자, 5학년 때까지 즐겁게 다니던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특히 우리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아 집안 사정이 어려워도 최대한 우리의 끼를 살려주려고 했다. 학습지 선생님이며, 학원도 기꺼이 보내 주셨다. 내가 'K장녀'로 안 클 수 있게끔 애쓰셨는데, 나는 나 스스로 집안 사정을 생각하며 좋아하는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다.
제주도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을의 작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내가 속한 학년은 두 개 반이었고, 합치면 총 50명이 되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할할 때까지만 해도 그 50명 중에 눈에 띄는 아이는 아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본 중간고사에서 갑작스럽게 1등을 했다. 공부에 관해서는 그전까지 별로 도드라져 보이는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부모님은 기뻐했고, 작은 시골 마을에는 '누구 집 딸이 1등 했다.'라는 소문이 났다. 그때부터였을까 '1등'이란 자랑의 무게가 매우 무거워졌다. 어느 순간 친구들 사이에서 '잘하는 아이', 마을에서 '훌륭한 딸'이라는 소문이 났고, 나는 그런 아이가 되어야만 했다. 그때부터였을까. 기대에 충족하고 싶은 마음으로 시험 전날 밤에는 새벽 4시까지 교과서를 달달 외웠다. 시험일에는 교과서 어느 부분에 어떤 그림이 나왔는지를, 어떤 문단에 빈칸을 뚫어도 그 빈칸의 단어마저도 모두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1등'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깨웠고, 엉덩이를 붙여 공부하게 했다. 그 이후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다. '타인'의 기대를 깨는 게 더 무서웠던 나는 '독기'를 품고 공부를 했다.
대학생이 되어 나와 전혀 성향이 다른 남편을 만나고서부터 '나'에게 사람을 대할 때 '벽'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편은 나에게 견고한 벽 하나가 단단히 세워져 있다고 했다. 벽 외부에는 모두에게 친절한 '나'가 있고, 벽 안으로는 알 수 없는 '나'가 있다고 했다. 타인이 절대로 들어올 수 없게 견고한 벽을 쌓아서 그 벽으로 인해 자신의 속마음도 꺼내질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이런 말을 듣고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학창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며 지금껏 연락해 온 친구가 없다. 학창 시절에 혼자 노는 아이도 아니었고, 무리에서 늘 잘 지내왔는데, 정작 깊이 있게 만난 친구가 없다. 무리 안에서 잘 웃고, 궂은일을 먼저 하고, 타인의 기분을 잘 맞춰주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친구 정도였을까. 나는 속마음을 꺼낼 줄 모르는 아이, 다른 사람에게 마음과 마음으로 만날 줄 모르는 아이였던지라 깊이 정을 나눈 친구가 없었다.
나는 정말 좋아하거나 잘하는 게 없다. 내 속마음을 들춰 꺼내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주변의 눈치를 먼저 본다. 내가 욕심부릴 때 주변이 어려워지면 바로 포기한다. 욕심이 생겨서 포기하는게 더 마음이 아팠을까. 무엇을 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나는 '싫다'라는 말을 못 한다. 내가 거절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사람의 표정을 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웬만하면 내가 힘든 게 낫다.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갈등 역시 싫어한다. 불편해지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가 손해 보고, 희생하고 있는 바보 같은 상황에서도 갈등을 피하기 위해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애쓴다. '나만 이해하면' 갈등은 없다는 생각으로. 억울하고 속앓이 해도 내 주변 사람들이, 분위기가 편안해진다면 나는 '내가 참자. 내가 하자.'며 또 나를 이해시키고 만다.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 없는 '나'의 모습을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는 너무 많이 아팠다. '나'라는 사람의 삶에 '나'는 없고, 온통 내가 신경 쓰는 사람들이 서 있다. '타인에게 좋은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은' 나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 나는 아주 많이 무리하며 살아왔음을 깨닫고, 너무 많이 앓았다.
그렇게 아프고 난 뒤부터였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견고히 쌓아온 벽을 부숴 보기로 했다. 찔끔찔끔 내 속마음이 삐져나올 수 있게끔 틈을 내기 시작했다. 내 마음의 벽 사이로 삐져나오는 마음의 말을 용기내어 꺼내 보기 시작했다. 참 미안한 일이지만 내 마음의 틈이 향하는 방향은 '남편'이었다. 내가 가장 믿을 수 있고, 나의 벽을 알아봐 준 남편에게 나의 벽을 허무는 일을 강제로 돕도록 했다.
"나는 자기의 말투가 예전과 다르게 나를 배려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요즘 속상해."
육아를 시작하며 서로 지친 상태가 지속되자 서로에게 향하는 말투가 날카롭게 바뀌어 있을 당시 내가 남편에게 용기내어 꺼내 본 말이다. 이 말을 남편에게 하기까지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꺼내 놓고는 눈물 한 바가지를 흘렸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나는 울었다. 그것도 많이.
이후로도 내 속마음이 나의 견고한 벽 틈새로 애써 삐져나올 때마다 나는 눈물을 보였다. 내 속에서 수없이 울리는 그 말을 내 입 밖으로 내 던지는 것이 이리도 힘들 줄은 몰랐다. 너무 힘들어서 속마음을 말할 때면 눈물이 차오른다.
남편을 상대로 울면서도 속마음을 내비치는 연습을 한 것이 도움이 됐는지, 요즘은 나의 직장에서도 '거절'의 용기를 낸다. 속에 담아 놓고 나를 이해시키기만 하면 됐던 '아픈 말, 아픈 상황'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나의 견고한 벽 틈새로 내 보내고 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도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와 같은 말을 하면서 나는 또 눈물이 찬다. 남 앞에서 말을 할 때는 울먹울먹 거려서 말을 하기에 창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너무 신기한 것은 내가 그렇게 울먹거리며 속마음을 꺼내 놓아도 상황은 크게 불편해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속마음을 꺼내서 불편해지는 상황이 싫어서 '내가 다 감수해야지.' 하며 나를 이해시키고 나를 힘들게 했는데, 정작 속마음을 꺼내도 불편해지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나' 스스로 '나'의 관점에서 상황을 해석하며 '나'를 괴롭히고 있었던 건 '나'였던 것 같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살았다. '나만 이해하면 돼. 불편해지기 싫으니 내가 하자.'와 같이 '나'를 억지로 이해시키려는 태도는 나에게 옅은 상처를 내는 일이었다. 옅은 상처도 돌보지 않으면 흉이 된다는 걸 '나'의 진짜 속마음을 꺼내봄으로써 알았다.
나는 울면서 말하기로 했다.
내 눈물이 나의 옅은 상처를 보듬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