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아 거울아, 이 회사에서 누가 최고의 빌런이니?

by 국물의 여왕

"거울아 거울아, 이 회사에서 누가 최고의 빌런이니?"

직장에 입사한 지 한 달이 지날 무렵, 붉은 고딕체의 “경고’로 시작되는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입사 환영 메시지 이후 무려 사장에게 처음으로 받은 메일이었다. 20여 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 그 메일의 첫 문장은 이랬다.

"경고 – 한 번만 더 실수하면 해고합니다."

며칠째 밤새워 준비한 첫 경쟁 PT준비로 혼미했던 뇌에 얼음물을 들이부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게 뭔 소리야?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요지는 간단했다. ‘뭣도 모르는 신입 주제에 사장의 검토도 받지 않은 채 클라이언트에게 메일을 보내 전체 업무에 혼선을 주었으니 이런 엄청난 실수를 용납할 수 없으며, 한 번만 더 실수하면 너를 해고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입사 한 달 만에 해고 경고라니, 눈을 비비고 다시 들여다봤지만 메시지는 명확했다.

‘왜 나만 갖고 이러는 건데...’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이름만 사수인 선배와 팀 총괄인 이사는 기존 고객사들의 업무를 처리할 시간도 모자란다며 너무나 쿨한 태도로 일관했다. 신규 고객사인 최첨단 IT기업의 첫 프로젝트를 입사 첫 주부터 내게 일임한 채 뭘 물어도 “글쎄요”, “그 정도는 알아서 하세요”라는 말 밖에 해주지 않는데 어쩌라고!!!! 이런 상황이니 입사 한 달 만에 고객사의 모든 요구와 메일들을 내가 거의 전적으로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문제의 발단이 된 나의 메일들은 고객의 질문에 대한 정확하고 신속한 대응이었고, 고객은 원활한 업무 처리에 나름 만족하던 차였다. 사장이 급발진한 이유는 그 메일의 원 발신자가 하필 고객사의 지역 총괄 임원이었기 때문이다. 한국도 아니고 아태 지역 전체를 담당하는 총괄 디렉터가 내내 대행사의 팀 총괄이 아니라 신입 AE와 일을 처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던 것이다. 우리 회사의 위계질서와 지원이 엉망이라는 반증이었다.

사장의 경고 메일은 팀 전체와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를 일개 신입사원의 업무 미숙 문제로 축소시켰다. 그리고 나와 입사 동기인 신입사원들에게 공포와 경각심을 조성하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사장은 나뿐 아니라 모든 사원들에게 입사 초기에 크고 작은 이유로 경고 메시지를 보내며 일종의 ‘군기’를 잡고 있었다.

주말 없이 밤샘 근무가 이어지는 혹독한 업무강도, 인수인계나 교육도 없이 바로 현장에 투입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직원들은 체력과 시간을 갈아 넣는 수밖에 없다. 그런 와중에 사장이 모든 채널을 통해 ‘너희들은 이것밖에 안 된다. 이렇게 부족한 너희들을 받아주고 월급까지 주고 있으니 고마운 줄 알고 일하렴’ 따위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내리꽂으니 매일매일이 죽을 맛이었다.

당연히 하루가 멀다 하고 회사를 그만두는 직원이 속출했다. 직원이 그만두면 사장의 살벌한 경고는 빈도와 강도를 더해 쏟아졌다. 그러니까 사장은 물정 모르는 신입들을 혹사시키면서 그만두지 못하게 하려는 나름의 가스라이팅 전략을 펴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가스라이팅이라는 개념조차 없었으니. 남 탓할 생각도 못하는 성실하고 다정한 심성의 직원일수록 자존감에 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렇게 스스로 모자란 사람이라 여기며 죽어라 일하다 몸이든 마음이든 버텨나지 못하는 직원부터 떨어져 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입사한 지 하루 만에 그만둔 직원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혜안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사장의 가스라이팅 전략이 직원들을 붙잡는 전략인지 탈출의 원인인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나는 그곳에서 1년 반을 일하고 그만두었다. 엄격하다 못해 혹독한 리더였지만 업계 최고의 프로페셔널로 불리던 사장 밑에서 배운 것도 많았다. 이 1년 반 동안 배운 것들로 이후 10년을 먹고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리고 입사 첫 달에 경고를 받은 그 회사에서 한 가지 다짐을 했고, 이후 20여 년에 이르는 직장생활 내내 최선을 다해 지켰다. 대행사의 말단 직원에서 글로벌 기업의 임원까지 굴곡 많았던 직장생활 동안 등대가 되어준 그 다짐은 무척 단순하다.

“내가 받고 싶지 않은 대접을 남에게 하지 말자.”

어떤 회사든 빌런은 존재한다. 하지만 빌런을 미워하다 스스로 빌런이 되는 악순환에 빠지지 않으려면 지속적인 성찰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로선 최선을 다해 노력했던 다짐 또한 누구에게나 충분하게 전달되었을지는 알 수 없다. 내내 구박받던 며느리가 최악의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가 되듯이, 나 자신은 어떠한가를 끊임없이 돌아보지 않으면 악습은 대물림되기 쉽다. 지옥의 외인구단 같던 그 회사에서 배운 가장 소중한 교훈이다.

당신의 회사에는 어떤 빌런이 살고 있는가?
설마, 없다고? 그렇다면 한 번쯤은 거울을 들여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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