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스트와 꼰대의 잘못된 만남

빌런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 면접장에서 만난 하이브리드형 빌런

by 국물의 여왕


“선생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나요? 최근에 본격적인 취준을 시작했는데 조언을 부탁드리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선생님께서도 잘 알고 계실 000사에서 첫 면접을 보았는데 여기서 시작해도 될지 감이 잘 서지 않아요. 편하실 때 연락 주신다면 너무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좋은 하루 되세요!”


수영씨는 친한 지인의 부탁으로 진로 및 취업과 관련해 멘토링을 했던 친구다. 대학졸업반이었던 그녀는 홍보와 마케팅 분야의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고 취업준비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현실 직장은 어떤 것인지, 어떤 준비를 하면 좋을지 궁금해하는 그녀의 고민을 들어주고, 나의 경험과 생각을 나눈 후 헤어진 게 1년 전이다. 졸업 후 1년 간 비영리기관에서 인턴을 마치고 본격적인 취업시장에 뛰어들어 첫 면접에서 합격을 한 수영씨가 연락을 해온 것이다.


수영씨가 지원한 회사는 한국 지사의 규모는 매우 작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누구나 알고 활용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글로벌 기업이다. 네임 밸류도 있고, 직원들이 대체로 장기근속을 한다는 것으로 보아 대우도 괜찮은 곳인 듯했다. 무엇보다도 수영씨가 원하는 해외 지사 근무도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무엇이 고민이어서 내게 전화를 했을까.

연락해 보니 똘망한 그녀답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이미 확인해 둔 터였고, 심지어 페이도 대기업 수준이다. 첫 직장으로 손색이 없는 좋은 기회라 여겨졌다.


“근데요. 뭔가 쎄해요.”

“쎄하다고?”

“네, 그게 좀…”

“인터뷰가 어땠길래?”

“면접을 보러 간 건 저인데… 사장님이 제게 궁금한 게 없으신 지, 질문은 안 하시고 자기 말만 하는 거예요. 너무 많은 말씀을 하셔서 1시간 예정인 인터뷰가 2시간 반 만에 끝났어요.”


지원자가 우리 회사에 적합한 인재인지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관문인 인터뷰 시간을 채용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데 다 쓴다고? 이건 좀…


“사장님이 어떤 이야기를 주로 하던가요?”

“정말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특히 이 회사에 들어오면 네 일 내 일 가리지 말고 해야 한다는 말씀을 여러 번 강조하셨어요. 작은 회사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너무 일방적으로 본인 말씀만 하시는 것도 그렇고 처음에 지원한 직무를 하게 되긴 할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수영씨가 포착한 이상신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인터뷰 중 물을 마셔도 된다는 말에 가져온 텀블러를 책상 위에 올려뒀다가 면접장에서 테이블 위에 그런 물건을 올려두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일장연설을 들었다. 글로벌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에 대한 자긍심으로 가득한 사장님께서 회사에 들어오면 일주일에 한 번씩 본인이 진행하는 역사 강의를 듣고 함께 공부해야 한다며 직원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도 내보이셨단다. 이제 나도 쎄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음… 수영씨에게 질문한 건 없었어요?”

“질문을 하긴 하셨는데… 남자친구가 있냐고요.”

뭐래니? 이게 웬 쌍팔년도 면접장에서나 들을 수 있는 질문이란 말인가?

첫 면접을 보러 왔을 뿐인 후보자에게 이미 입사한 사람인양 훈계와 일장연설을 늘어놓은 것도 그렇고, 요즘처럼 프라이버시를 중시하고 차별적 발언을 조심하는 면접장에서 이런 부적절한 질문을 하는 것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영민한 수영씨는 이미 이상징후를 감지하고 벌써부터 그녀의 입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회사에 이대로 휩쓸리듯 입사를 해도 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취업이 어려운 시대에 이 정도의 근무조건과 급여 수준을 갖춘 직장을 그냥 포기하는 게 맞을지, 혹시 자신이 너무 예민한 것은 아닌지 경험 많은 선배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아무리 회사의 대표자라지만, 아니 대표이기에 더욱 그렇지만, 들을 줄 모르는 상사와 일하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시대착오적이고 차별적인 언사 또한 묵과할 수 없는 꼰대질이다. 하지만 요즘같이 혹독한 취업시장에서 다른 대안 없이 좋은 조건의 직장을 걷어차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없었다.


일단 자신이 너무 현실을 모르고 예민하게 생각한 것이 아닌지 우려하는 수영씨에게 당신의 감은 결코 틀린 게 아니고, 충분히 우려할만한 상황임을 알려주었다. 다만 바로 거절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결정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조금 더 조사를 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전했다. 결국 수영씨는 이제 막 뛰어든 취업 시장에서 이곳을 마지막 옵션으로 남겨두고, 아직 진행 중이거나 곧 시작할 다른 기업들의 면접을 차근차근 진행하면서 나와 상황을 계속 논의하기로 했다. 다행히 회사의 최종 통지일과 입사일은 꽤 시간이 남아있어서, 최종 결정을 하기 전에 링크드인을 통해 알게 된 그 회사의 OB에게 의견도 구해보기로 했다.


내 이야기만 하고 남 이야기를 들을 줄 모르는 상사는 경계 대상 1호다. 여러 사람이 일하는 조직에서 내 입장과 의견만 말하고 관철하려 드는 사람은 다른 이들의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며 일을 어렵게 만든다. 결국 조직에 속해 일한다는 것은 개인의 역량을 넘어 집단 지성과 시너지를 활용해 더 큰 성과를 내기 위함인데,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기본 역량인 소통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상사라면 그 독주를 막기가 대단히 어렵고, 막상 그 상사의 의견대로 일을 진행하다가 잘못될 경우, 부하직원들에게 도리어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며 책임을 전가할 가능성도 크다. 심지어 팀원이 다른 의견을 제시한 바 있더라도, 자신은 들은 바가 없다며 부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인의 입장에서는 거짓이 아닐 수 있다. 귀 기울여 듣질 않았으니 기억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상사와 일할 경우에는 주요 사안은 이메일과 보고서 등을 통해 제안 사항을 확실히 남겨두고, 가능하면 회의를 통해 여러 사람의 증인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다. 증거 자료로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해줄 뿐 아니라 추후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일을 진행해야 할 경우 맨 땅에서 시작하지 않고 자료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에는 이렇게 듣기에 문제가 있는 ‘사오정’ 같은 빌런들이 생각보다 많다. 위 사장의 경우는 나르시스트이자 독불장군 타입이지만, 실제로 들은 것을 깜빡하는 주의력결핍형 상사들은 매우 흔하다. 사실 임원들은 정도가 심하든 경미하든 대부분 주의력결핍장애(ADHD) 증상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리는 없다.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ADHD형 임원의 사례는 다음 장에서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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