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마센(すみません), 아직 마음의 앙금이 맑아지지 않았다는 고백
도쿄 한복판에서
나는 졸지에 ‘무서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길을 잃고 표류하던 어느 오후,
멀끔한 인상의 20대 남성에게
조심스레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낯선 이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간 것은
짧은 호흡과 함께 던진 이 한마디였다.
“Excuse me?”
그 순간,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대답 대신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마치 투명한 벽에 부딪힌 듯 움찔하더니,
이내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인파 속으로 숨어드는 그의 실루엣은
비현실적이었고,
찰나의 정적 뒤로 가녀린 외침만이
환청처럼 남았다.
“すみません…!” (스미마센…)
어안이 벙벙했다. 일본인은 친절하다던
여행 블로그는 낭설이었을까?
내가 무서웠나?
머릿속을 스치는 서늘한 자각 하나.
‘아, 내가 던진 영어가 폭탄이었구나.’
영어라는 거대한 해일로 다가올
첫 공포탄을 마주한 청년에게,
그 상황은 이미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서 있었을 것이다.
그는 짧은 거절의 말과 함께
스스로 '증발'하는 쪽을 택했다.
“Excuse me”라는 낯선 침입 대신,
상대의 공간을 두드리는
익숙한 ‘노크’가 먼저였어야 했다.
“저기~, すみません~"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스미마센”은
사과가 아니었다.
차라리 비상탈출 장치의 레버에 가까웠다.
자신이 길을 모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영어를 유창하게 뱉어내지 못할 것 같은
당혹감,
도움을 주지 못할 때 발생하는
메-와쿠(迷惑,めいわく, 민폐)의
공포감.
그는 그 거대한 메-와쿠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가장 부드럽고도 단호한 방식으로
관계의 전원을 꺼버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단어의 속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스미마센’의 뿌리는
‘끝나다’ 혹은 ‘해결되다’라는 뜻의 동사
‘스무(済む)’에 닿아 있다.
한자 ‘건널 제(済)’를 뜯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물(氵) 옆에 가지런함(斉)이 붙어 있는
이 글자는,
흙탕물이 가라앉아
수면이 맑고 평온해진 상태를 뜻한다.
済 (건널 제)
氵 (물 수): 여기서는 사람의 마음 상태
斉 (가지런할 제): 질서 있고 평온한 상태
의미: 흙탕물이 가라앉아 수면이 맑아짐
동사 済む(스무)의 부정형 정중체가 바로
済みません(すみません, 스미마센)이다.
기본형: 済む (すむ, 스무)
뜻: 끝나다, 해결되다, (마음이) 가라앉다.
정중체(긍정): 済みます
(すみます, 스미마스)
뜻: 끝납니다, 해결됩니다.
정중체(부정): 済みません
(すみません, 스미마센)
뜻: 끝나지 않습니다, 해결되지 않습니다.
결국 ‘스미마센’은 직역하면
‘맑아지지 않았습니다’라는 뜻이다.
너와 나 사이에 생긴 이 미묘한 앙금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기에,
내 마음의 수면은
여전히 흐릿하고 일렁인다는 뜻이다.
상대에게 입힌 폐나 신세를 진 마음이
아직 정산되지 않아
내 마음의 호수가 여전히 탁하다는
자기 고백인 셈이다.
그 청년에게도 그 한마디는
무례가 아닌 최선의 배려였다.
그는 “모른다”거나 “싫다”는 거절의 말로
상처를 주는 대신,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해결해 줄 수 없으니
이쯤에서 대화를 종료하겠다”는
가장 고요한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나는 복잡한 도쿄 거리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어의 사전적 정의를
외우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체득하는 과정이다.
나의 ‘Excuse me’가
예고 없이 날아든 묵직한 돌덩이였다면,
그의 ‘스미마센’은
수면 위에 일어난 아주 얇은 파동이었다.
나는 상대의 평온을 깨뜨리며 성큼 발을 들였고,
그는 그 흔들림을 더 이상 키우지 않기 위해
서둘러 관계를 수면 아래로 가라앉힌 것이다.
인파 속으로 사라진 청년의 뒷모습 위로
아직 가라앉지 않은 흙탕물 같은
‘스미마센’이 오래도록 일렁였다.
‘미 완결의 상태’를 인정하는 이 한마디는
일상 속에서 다섯 가지의 정교한
안전장치(버퍼)로 작동합니다.
사과: 미안함을 정산하는 즉각적인 신호
지하철에서 타인의 발을 밟았을 때,
우리는 즉시 미안함을 느낍니다.
상대의 불쾌감을 상쇄하려는 즉각적인
완충 신호입니다.
「あ, すみません! 大丈夫ですか?」
아, 스미마센! 다이죠-부데쓰까?
(아,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부름: 대화의 채널을 열기 위한 정중한 예치금
식당에서 점원을 부를 때,
나는 그의 평온한 흐름을 잠시
가로채는 셈입니다.
정중하게 소통의 채널을 여는
접속 신호가 됩니다.
「すみません, 注文お願いします。」
스미마센, 주몬오네가이-시마스
(저기요-, 주문하겠습니다.)
감사: 다 갚지 못한 호의에 대한 부채 고백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았을 때,
"고맙다는 말만으로는 마음의 빚이
다 청산되지 않네요"라고 말해보세요.
과분한 호의에 대한 깊은 존중을 담은
겸양의 표현입니다.
「あ, すみません!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아, 스미마센! 아리가또-고자이마스
(어머, 뭐 이런 걸 다...감사합니다.)
질문: 타인의 시간을 빌리기 전 지불하는 통행료
길을 묻는 행위는 타인의 일상을
잠시 멈추게 하는 일입니다.
타인의 공간에 침범하기 전
미리 울리는 다정한 경보음입니다.
「すみません、駅はどこですか?」
스미마센, 에키와 도꼬데스까?
(저기-, 역은 어디인가요?)
거절과 이탈: 정산할 수 없는 상황을 멈추는
비상 브레이크
나의 에피소드 속 청년처럼,
민폐를 범하기 전에
관계가 엉키지 않도록 스
스로를 격리하는 차단 신호입니다.
「あ… すみません!」
아…스미마센!
(미안합니다, 전 이만!)
"여러분이 경험한 '스미마센'은
어떤 '안전장치'였나요?"
-또마-
[주석]
메-와쿠(迷惑,めいわく, 민폐) 개념: 일본에서는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상황 자체를 피하려는 문화가 있습니다. 단순히 '민폐'로만 번역하면 한국어의 '민폐 캐릭터' 같은 부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메-와쿠(迷惑)'는 “상대의 평온한 상태를 흐트러뜨리는 모든 행위"에 대한 미안함을 담고 있습니다.
"정중한 거절의 끝에서 나는
또 다른 열쇠를 찾아 나섰다.
모든 문을 긍정으로 열어젖히는
마법 같은 단어, '도-모(どうも)' 세계로."
덧붙이는 글
"이 이야기는 언어라는 렌즈로
사람 사이의 '결'을
들여다본 개인적인 기록입니다.
언어의 모든 쓰임새를 정의하기보다는,
그 말이 관계 속에서
어떤 온도로 작동하는지 관찰한
지극히 사적인 발견을 담았습니다.
특정 문화나 언어를 하나의 틀로
일반화하기보다,
그 너머에 숨은 마음의 모양을
조심스럽게 헤아려보고자 합니다."
-또마-
[말말말, 내 맘대로 사전(私典) 01]
스미마센(すみません)
격주 수요일 밤 9시,
서랍을 하나씩 엽니다.
[다음 서랍]
아비앙또!
응?, 아리가또?
그날 파리에서 무슨 일이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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