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게 늙고싶다.
친정 엄마에게 아기를 잠시 맡기고, 병원을 핑계삼아 외출했다. 낮에 혼자 외출하기란 쉽지 않을 일이라 나온 김에 그동안 미뤄뒀던 일들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주목적이었던 이비인후과에 가 맥주를 마시면 목이 붓는 상태에 대해 설명했고, 의사선생님은 알러지표를 가지고 와 꼼꼼히 살피더니 보리와 효모에 대한 알러지 검사를 하는게 좋을 것 같다 한다. 피 뽑는 것을 질색하는 나는 (그래서 헌혈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다.) 피검사하는 것이 너무 싫었지만,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맥주를 마시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알러지 검사를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주목적인 병원 진료를 마치고 이번에는 은행 ATM기로 향했다. 은행 지점과 함께 있는 ATM 창구라 기기만 여섯대가 설치되어 있는 꽤 큰 ATM 창구였다. 사람들이 다섯 개의 기기에서 모두 일을 보고 있었고, 남은 하나의 기기에는 불상의 누군가가 기기를 파손시켰으며 지금은 이용이 어렵고, 이용하는 분들도 기기 파손에 주의해달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좌측 끝에 있는 ATM기기가 비어 나는 가방에서 현금을 꺼내 입금을 시작했다. 30대가 넘어 출가한 나에게 부모님이 가끔 주시는 용돈을 모아뒀다 한번에 통장에 넣어 목돈으로 쓰는 편이다. 오늘은 이 돈으로 저녁에 짝꿍(남편)과 맛있는 것을 시켜먹을거란 행복한 생각을 하며 기기가 지폐 세는 소리를 들었다.
옆에서 흘깃흘깃하는 눈치가 느껴졌다. 방어태세로 곁눈질하니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모자를 쓰신 할아버지께서 도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돈이 안나와요. 분명히 내가 뽑았는데...“
하며, 두 손에 꼭 쥐고 계시던 통장을 펼쳐 나에게 보여주셨다. 처음 보는 나에게 통장 잔고를 보이는 행동과 공손하신 할아버지의 말씀에 미리 세워두었던 마음의 방어선이 스르륵 사라졌다. 노인복지관에서 잠깐동안 일했었던 경력이 화르륵- 살아나 그동안 잊혀져있던 나름의 붙임성을 발휘했다.
"여기에 분명히 돈이 빠져나갔다고 찍히는데 돈이 안나왔어요."
"여기에 적힌 건 입금이 되었다는 거고, 출금되었다는 내역은 없네.”
반말을 하는 사람은 나, 존댓말을 하는 사람은 할아버지. 글로 보면 꽤나 버르장머리가 없을지 모르지만 나만의 어르신을 대하는 방법이다. 그제야 할아버지께서는 환한 표정으로 그러냐며 다시 해보겠다 하셨다. 혹시나 어려우실까봐 옆에서 기다리며 언제라도 도와드리려고 했지만 이내 ATM기기에서 지폐 세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올거에요.“
"고맙습니다."
도와드린 것도 딱히 없었지만 할아버지께서는 나에게 연거푸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셨고, 고맙다고 전하셨다.
나이가 들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본래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나이가 드는 것일까?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이 명제가 참이라면 전자의 '나이가 들면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한다.'는 말은 거짓인 명제가 된다.
나 역시 3n년 살면서 겪어본 경험을 토대로 후자 '본래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나이가 드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배려는 몸에 배어있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냥 원래 그랬던 사람이 그렇게 늙어간 것일 뿐이다.
고로 나는 이기적인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내가 되지 않기 위해 때에 따라 오늘부터 마음을 부드럽게 먹고 살아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