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내 방이 처음으로 생겼을 때 나는 부모님께 가장 먼저 화장대를 사달라고 했다. 화장을 많이 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20대 그 풋풋한 젊은이들이 그러하듯, 화장대란 으레 있어야 하는 필수 가구였다. 처음으로 화장대가 생긴 나는 매우 신났다. 많지도 않은 화장품을 보기 좋게 올려두기 위해 투명한 아크릴 정리함도 사고 엄마 방에서 유통기한 지난 예쁜 향수병들도 몰래 훔쳐와 전시용으로 놓기도 하였다. 당시에도 수납 짱짱한 게 최고라고 여기던 나는 서랍이 많은 화장대를 선택했었는데, 이는 부족한 잡동사니 수납에도 탁월했다.
결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방이 두 개뿐인 작은 집이었지만 안방에 화장대는 당연히 필수였다. 침대를 조금 무리다 싶을 정도로 큰 사이즈를 샀더니(이름도 무려 라지킹이었다) 사실 방 안에 남은 공간이 크지는 않았다. 꾸역꾸역 화장대를 넣을 각을 보고 있는데 남편이 말했다.
”화장대는 꼭 필요한 거지? “
아니 무슨 그런 서운한 소릴. 내 비록 유부녀가 되었지만 여자로서 응당 꾸미고 가꿀 공간은 필요한 것 아닌가. 그리고 그 당시만 해도 안방의 정체성은 화장대라는 이상한 선입견마저 있었다. 그렇게 작은 방에 꾸역꾸역 화장대를 집어넣은 나는 화장대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매일 화장대에 앉았다. 그러나 ’ 화장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그곳에서 화장을 하는 날은 점점 더 적어졌다. 결혼하고 바로 아이가 생기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세수 한 번 하기도 바빴다. 그나마 화장대의 기능을 할 때는 씻고 나서 머리를 말릴 때 정도였다. 일기를 쓰겠다며 책상 대용으로 사용해 보기도 했다. 좁은 상판 탓에 위에 있는 물건들을 이리 밀고 저리 밀며 성질만 더 나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몇 번의 이사 때마다 나의 화장대는 늘 제거 대상 후보에 올랐지만 화장대를 향한 나의 애착은 포기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남편의 유학으로 미국에서 1년 반동안 생활할 기회가 생겼다. 작지만 세 가족이 지낼 기숙사도 제공된다고 했다. 그때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제 화장대를 놓아주어야 할 때구나. 화장대를 중고 거래 앱에 올렸다. 저렴하게 내놔서인지 화장대는 제대로 된 이별 인사를 하기도 전에 팔려버렸다. 떠나가는 화장대를 보면서 이상하게 섭섭하기보다는 시원했다. 조금이라도 쓸모없는 물건이라면 가차 없이 버려, ”버려 선생”으로 불리던 내가 화장대에 있어서 만큼은 냉정하지 못했음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갈 곳을 잃은 나의 몇 개의 화장품들은 미국에서 다행히 딱 맞는 새 집을 찾았다. 바로 욕실 거울 뒤에는 숨겨져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외국 영화에서 평소 지병이 있던 주인공이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약을 꺼내 먹던 그곳이었다. 물어보니 이 나라 사람들은 이곳에 평소 자주 먹는 약이나 화장품을 보관한다고 했다. 그전까지 화장품을 욕실에 보관해 볼 생각을 못 해봤는데 직접 해보니 여러 면에서 장점이 있었다. 먼저 동선이 훨씬 편해졌다. 씻고 바로 욕실에서 머리를 말리고 기초 제품까지 바르니 잘 준비가 간단히 끝났다. 나이가 들면서 바짝 말라가는 나의 피부에 조금이라도 빨리 수분 충전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욕실은 나의 새로운 화장대가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나는 화장품을 욕실에 보관한다. 에센스, 크림 등의 기초 제품뿐만 아니라 가끔씩 하는 마스크 팩들과 색조 화장을 위해 이제는 제법 많아진 브러시들 역시 이곳에 보관한다. 집을 구할 때 욕실 수납장의 크기 역시 나에게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조명들이 다닥다닥 달린 멋진 화장대에서 메이크업을 받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볼 때면 여전히 부러울 때도 있지만, 원래 조명은 화장실이 가장 예쁜 법. 새로운 화장대에서 마무리하는 나의 하루도 참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