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빨리 정리를 끝내는 방법
아무리 정리 덕후를 칭하는 나라도 365일 매일 정리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애초에 정리를 열심히 하게 된 것도 천성이 게으른 탓이다. 자주 하기 싫으니 ‘한 번에 제대로 해두고 신경 쓰지 않고 싶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주부들이 알다시피 정리를 포함한 살림이라는 것이 이상하게도 매일 해도 티가 안 나고 하루 이틀만 미뤄도 티가 팍팍 나는 오묘한 것이다. 나는 특히나 겨울이 되면 게으름이 극에 달하는데, 여름생이라 그런 건진 몰라도 여름엔 기운이 쌩쌩 넘쳐 조금 더 부지런을 떨지만, 겨울이 되면 겨울잠 자는 곰처럼 먹고 누워있기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겨울이 되면 정리 덕후란 말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집이 엉망인 상태가 된다. 어떡하든 다시 기운을 차리고 부지런을 떨어보려 노력하지만 이쯤 되면 스스로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럴 때 내가 가장 극단적으로 쓰는 방법이 있다. 바로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다.
친정 엄마 신혼 시절 이야기를 들을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야기가 아빠가 한 밤중에 예고도 없이 친구들을 데리고 쳐들어온 썰들이다. 분명 기분파인 아빠가 밖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충동적으로 “2차는 우리 집으로 가자! “를 외쳤을 테고 눈치 없는 친구들은 그런 아빠를 따라갔을 테지. 그러나 현모양처인 엄마는 그런 예고 없는 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오징어 숙회 쪽파말이와 얼큰한 탕 하나를 얼른 끓여 내었다는 영웅담(?)을 들려주곤 하였다. 지금이라면 어느 게시판에 간 큰 남편으로 소개될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던 듯하다. 그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있으면 응당 집으로 초대하여 접대하는 일이 많았다. 나 역시 결혼하고 나서는 집들이라는 명목하에 내 친구들과 남편 친구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물론 옛날 엄마의 영웅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직접 차린 음식 대신 배달 음식으로 바뀌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실 요즘 시대에 집들이를 제외하고는 서로를 집에 초대하여 음식을 나눠 먹는 일은 많지는 않은 듯하다. 외식 문화가 잘 되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굳이 집이 아니어도 분위기 좋은 맛집에서 만나 저녁 한 끼 먹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배달 음식을 시켜 먹더라도 먹은 용기들 정리에 하나둘씩 나온 식기들을 정리하는 것도 꽤나 번잡스러운 일이므로 호스트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무엇보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서로의 집에 오가는 것에 더욱 거부감이 생긴 것도 한 몫하는 듯하다.
이런 생활이 익숙해져서인지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장 적응 안 되는 점이 바로 누군가를 집에 초대하는 일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알게 된 한국 지인 분께서 ‘커피나 한 잔’하자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나는 당연히 근처 카페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물론 근처에 살긴 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집으로 오라는 그녀의 초대가 나는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집을 보여준다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점이 조금 충격적이었다고 할까. 빈손으로 가기 뭐 해 초콜릿까지 사들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같은 기숙사였기 때문에 구조는 비슷했지만 다른 분위기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집이었다. 함께 수다를 떨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그녀는 이번에는 가족들과 주말에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나였으면 커피 타임도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저녁 초대라니. 나는 황송하기도 하고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자주 하던 ”밥이나 한 번 먹자 “와 같은 빈말인지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정말 진심이었고 나는 또한 번 그녀의 집에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낯선 미국에서 이렇게나 극진한 대접을 받다니. 사실 나는 그날 좀 많이 감동했다. 그리고 은혜 갚은 까치에 빙의하여 그녀의 가족을 우리 집에 초대할 원대한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배달 음식 없이 상차림을 하는 것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긴 했지만 남편과 머리를 굴려 애피타이저와 메인 메뉴, 디저트까지 세심히 정했다. 그리고 그에 맞는 와인과 맥주, 하드 셀처까지 냉장고에 꽉꽉 채워 넣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정리와 청소였다. 손님들이 부엌 상부장과 거실의 서랍장 하나하나를 열어볼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였다. 뜬금없이 발동되는 완벽주의가 또 쓸데없는 타이밍에 꿈틀거렸다. 말 그대로 대청소에 들어갔다. 안 방부터 화장실, 거실까지 쓸고 닦기 시작했다. 그러나 40년이 되었다는 기숙사 건물은 쓸고 닦아도 세월의 티가 났다. 페인트칠을 다시 할까 라는 미친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지만 다행히 금방 정신을 차렸다. 전날 큰 것들을 대충 정리하고 당일 아침 8시부터 청소, 요리를 해나갔는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남편에게 맡기기엔 뭔가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내 손으로 다 해야 마음에 들 것 같았다. 잔뜩 날이 서서는 남편과 딸을 방해 말라며 방 하나에 가둬놓고는 약속 시간 5시까지 미친 듯이 집 치장을 끝냈다.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었는지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 날 몸살이 나고 말았다. 쓸데없이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던 탓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후에도 사람들을 집에 초대할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외식비도 비싸고 대중교통도 잘 없는 미국 시골 동네에서는 대부분 서로의 집에 초대하여 먹는 것이 하나의 문화였다. 여름에는 이 집 저 집 돌아가며 바비큐 파티를 했고, 자신의 나라 음식을 하나씩 들고 만나 즐기는 포트락 파티도 자주 열렸다. 감사하게도 주변에는 인정 많고 친절한 좋은 이웃들이 많았다. 집에 초대받고 초대하는 것이 부담스럽던 것도 잠시, 어느새 함께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수다 떠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받은 것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했지만 나 역시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나는 어깨에 잔뜩 올려져 있던 부담감을 내려놨다. 매번 그 요란을 떨며 다음날 몸살이 날 수는 없었다. 가족들과 업무를 나누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도저히 정리 청소와 요리까지 혼자서 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나 요리는 정말 자신이 없었다. 요리는 평소 셰프를 자처하는 남편에게 넘겼다. 나는 집 정리와 청소에만 신경 썼다. 딸 역시 아이들 담당으로 함께 놀거리들을 준비하고 세팅해 놓는 업무를 맡아 힘을 보탰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점차 초대 전문 가족으로 성장해 갔다.
크고 작은 지인 초대 경험으로 깨달은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집을 정리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어깨에 힘은 뺐어도 누군가를 초대하면 확실히 정리 본능이 살아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 점을 때때로 이용한다. 게으름이 스멀스멀 몸을 지배하는 때가 되면 누군가를 초대하는 것이다. 특히나 친정 엄마를 초대하면 효과가 좋다. 친정 엄마는 기본적으로 잔소리를 내장하고 오시기 때문에 조금 더 각성할 수 있다. 손님들은 절대로 열어보지 않는 서랍장도 벌컥벌컥 열기 때문에 디테일까지 신경 써야 한다. 쫄깃쫄깃한 맛이 있어 자주 이용하는 방법이다. 사실 한국에 오고 나서는 다시 손님 초대할 일이 많이 없어졌다. 그래서 나는 요즘 딸아이의 친구들을 자주 초대한다. 아무리 어린이 손님들이라지만 딸아이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정리를 한다. ‘오늘은 무슨 간식을 준비해 볼까 ‘하는 소소한 재미도 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일찍 끝나는 수요일엔 딸의 친구들로 집이 북적북적하다. 선천적 정리 덕후가 아니라면 이런 후천적 연습이 필요하다. 나만의 정리 트리거를 많이 만들어 두는 것이다. 원래 의지라는 것은 믿을 것이 못된다. 몸뚱이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계기들을 만들어두는 것 역시 ‘정리력’에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