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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펀치 Mar 05. 2017

때로는 길을 잃어야, 길을 찾을 수 있다

[김종관] 최악의 하루 Worst Woman(2016)

"우리는 모두 은희를 만났다"

긴 긴 하루였어요.
하나님이 제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에요.
안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겠어요.
그쪽이 저한테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원하는 걸 드릴 수도 있지만, 그게 진짜는 아닐 거예요.
진짜라는 게 뭘까요. 전, 사실 다 솔직했는걸요.
커피 좋아해요? 전 커피 좋아해요.
진하게.. 진한 각성.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거든요.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콘 사토시의 <퍼펙트 블루>, <천년여우>, <파프리카> 영화를 몰아본 뒤 감독에게 삶이란 곧 영화, 그리고 그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곧 배우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 <최악의 하루>도 그랬다. 무명 여배우인 주인공 은희에게 무대와 삶의 공간은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삶과 달리 무대는 공식적으로 거짓말이 용인되는 공간이라는 것뿐. 우리는 모두 살면서 이런저런 연기를 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생기는 불협화음. 은희는 때로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지고지순한 여자이기도 하면서, 바람피우는 남자 친구를 쥐락펴락하는 새침한 여자이기도 하다. 무대 위에서 서툰 연기자이기도 하면서,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는 몇 배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프로 연기자. 그 모두는 분명 은희 자신의 일부이지만 한편 심장의 주변부일 수밖에 없다. 


왜 소중한 사람들에게 마음 주변부만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한 가지일까? 은희가 인간이기 때문에, 혹은 모든 상대가 은희에게 무언가를 바랐기 때문에.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자신이 만나고 싶어 하는 여자를 은희에게 투영했다. 


은희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 역할을 (여러 군데에서) 충실히 해낸 것.



익숙하기 때문에 발견하기 힘든 것이 있다. 우리는 너무 유창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의 본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짓말은 너무 쉽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은 더더욱 쉽기 때문에. 그렇기에 우연히 만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일본 작가야말로, 은희의 중심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길을 잃어야, 길을 찾을 수 있다.

더듬더듬 어눌한, 유창하지 못해 거짓말조차 할 수 없는 그 어눌함 속에서 우리는 위안을 얻고 마음의 빗장을 푼다. 유창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여줄 수밖에 없는 나의 손짓, 몸짓, 나만의 춤. 그리고 진심. 가장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가장 가까이 가 닿을 수 있다. 서로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는 관계. 아는 것도, 알아야 할 필요도 없는 우연한 관계. 




우리는 모두 은희를 만났지만, 모두 은희를 만나지 못했다. 가장 은희를 모르는 단 한 사람만이 은희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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