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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펀치 Mar 14. 2017

낭만의 뒷면에 대하여

-애니메이션 [카우보이 비밥]을 보고

“취하다 즐기다 빠지다 꿈꾸다”


낭만은 보통 뒤에 이런 동사를 두고 자주 쓰인다. 취하고 즐기며 주로 꿈꾸는 것. 영원한 사랑이나 꿈, 열정처럼 마치 언제고 깨지지 않을 것 같은 단어와도 함께 쓰인다. 이런 언어에서 느껴지는 정제된 아름다움과 벅찬 감정이 있다. 낭만의 정면은 유리잔처럼 반짝이고, 아름답다.  


그러나 낭만의 뒷면에는 또 다른 모습이 있다. 이쪽은 투쟁과 눈물에 더 가깝다. 낭만의 정면을 진열대 속 케이크에 비유하자면, 뒷면은 인적 드문 계단에 앉아 허겁지겁 입에 욱여넣는 소보로 빵에 가깝다. 전자가 친구들과 함께 부딪히는 맥주잔의 경쾌한 소리라면, 후자는 혼자 기울이는 소주병과 닮았다.


와타나베 신이치로 감독의 [카우보이 비밥]은 SF 우주 활극 애니메이션이다. 미래의 어느 날, 위상차 게이트를 만드는 도중 문제가 발생해 달이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이후 떨어지는 파편들 때문에 지구에서 살 수 없게 된 인류는 다른 행성들로 이주한다. 이 세계에서 범죄자들은 행성을 옮겨 다니며 경찰로부터 도망친다. 그리고 현상금 사냥꾼들은 이런 현상범을 잡아 돈을 번다.


현상범을 쫓는 비밥호에는 현상금 사냥꾼(스파이크, 제트, 페이) 3명과 천재 해커(에드워드), 그리고 데이터 견(아인) 한 마리가 타고 있다. 함께 현상범을 잡고, 과거를 좇으며 그들은 이런저런 모험을 하게 된다.


네 사람의 우정과 낭만적인 동료애를 다룰 법도 한데, 작품은 낭만의 이면에 있는 치열한 삶과 떨칠 수 없는 과거에 더 집중한다. 아무리 일을 해도 돈은 모이질 않고, 떨치고 싶은 과거는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 나를 사랑했노라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동료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다. 우정과 사랑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누구나 마음대로 훌쩍 떠나버린다.

출처 https://kr.pinterest.com

끈끈한 동료애, 영원을 약속한 사랑, 아름다운 우정 따윈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밥호에서는 묘한 낭만, 낭만의 뒷맛이 쓰게 느껴진다. 10년 전의 내가 나에게 보내온 응원의 비디오테이프, 고기 없는 고기 잡채, 낡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이런저런 프로그램. 모두 훌쩍 떠나긴 하지만, 또 마음대로 돌아온다. 음악감독이었던 칸노 요코의 음악도 그러한 정서를 만드는 데 한몫한다. 날카로운 격투신 위로 흐르는 재즈. 삶은 그렇게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슬프고, 안타깝고, 또 재미있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이런 묘한 낭만은 네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내는 진심에 기인한다. 그들은 상처 입은 과거도, 고통스러운 현실도 웃음으로 승화해낸다. 감정에 충실하지만 결코 감상적이 되지는 않는다. 삶의 무게를 온전히 지고 일어나 웃으며 길을 걷는 것. 힘들 때는 서로 잠시 기댈지언정 내 무게중심까지 넘겨 버리지는 않는다. 각자의 납덩이를 하나씩 이고 있지만 툭툭 털고 일어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생의 끝을 향해 다시 걷는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얻고자 하는 것은 돈보다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고, 사랑보다는 과거에 대한 예의이며, 삶에 대한 열정이다. 비밥호의 낭만은 어딘가 눅눅하다. 맑고, 굳세고, 아름다운 낭만뿐만 아니라 슬프고 어둡고 무겁지만 이렇게 끝끝내 웃음으로 버티어 나가는 종류의 낭만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94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재즈 스타일 ‘비밥(Bebop)’. 자유분방하고 비대칭적이며, 즉흥 연주가 주된 특징이다. [카우보이 비밥]의 세계는 이 ‘비밥’과 닮았다. 즉흥적이고 비선형적이다. 이유 없이 사고를 당하고, 버림받고, 미래를 계획하기보다는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살아간다. 비밥호는 우리 삶의 은유이기도 하다.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역시 행복과 아름다움보다는 고뇌와 슬픔으로 얼룩진 시간을 이겨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낭만의 진정한 얼굴일지도 모른다.


재즈에서는 특정한 몇 음을 의도적으로 반음씩 내려 연주하는 ‘블루 노트(Blue Note)’ 기법을 주로 사용한다. 우리의 삶도 반음 내린 ‘블루 노트’와 비슷하다. 어지럽고 처연하지만 한편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리고 그곳에는 부서질지언정 절대 주저앉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마치 비밥호의 카우보이들처럼.


출처 https://hqwallbase.site


https://www.youtube.com/watch?v=l8wWa3O9cUo

Cowboy Bebop OST 1 - Rush

https://www.youtube.com/watch?v=700IZ0Nobjk

Future Blues 16 Gotta knock a little harder (극장판 엔딩곡)


원문: [덕업상권](66) <카우보이 비밥>, 낭만의 뒷면에 대하여

http://www.kbs.co.kr/radio/magazine/story/2535550_1020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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