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2024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펀치 Feb 15. 2024

능소화, 그리고 라디오

Like June

업신여길 ‘능’, 하늘 ‘소’, 꽃말은 여성과 명예. 태풍과 장마를 퍼붓는 하늘을 업신여기고 기어이 8월에 피어나는 꽃. 전에 능소화에 대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능소화는 피어남 자체가 승리인, 이기는 꽃이라고. “하늘아 네가 제 아무리 난리를 쳐 봐라, 나는 끝끝내 피어나고 말지” 하는 오기의 꽃이라고. 그 글을 보고 나서 자주 지나는 도로 옆 능소화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꿋꿋하게 피어있구나. 하늘을 업신여기며 기어이 오늘도 살아있구나.


예전엔 달랐겠지만 지금 라디오 PD 일을 하며 살다보면 누구라도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 있다. 따뜻함, 소중함, 기대 그리고 실망, 뭉클함, 애틋함.. 누군가에게는 삶의 소중한 원천이지만 결코 세상의 중심을 뒤흔드는 주류까지는 될 수 없고, 세상은 계속 점점 빠르고 복잡하게 옆을 스쳐간다. 가끔은 찬란했던 영광과 과거가 사라진 터에 앉아 고궁 벽을 부숴 그걸 땔감으로 몸을 녹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기대할 것보다는 두려울 게 더 많은, 그 중 가장 무서운 건 끝끝내 이 길을 달려 도달할 그 곳에 혹시 ‘희망’이 없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 아닐까.


몇달 전, 한때 라디오의 전성기를 살던 선배가 노래를 냈다고 했다. 음악을 잘 알고 또 좋아하는 분이었는데, 한참 두 딸 육아휴직으로 현업을 떠나있다가 훌쩍 돌아온 뒤였다. 잘 들어보겠노라고 답장을 보내고 퇴근길 차안에서 노래를 틀었다. 제목이 하프마라톤이라니, 쉬는 동안 마라톤을 하셨다고 했었나? 경쾌한 기타소리로 시작하는 도입부에 퇴근길 들뜬 마음이 더 가벼워졌다. 그땐 다가올 감정의 동요를 예상치 못했지...


https://youtu.be/_F9arl6ueio?si=-tdydEQoITd2l908​​



호흡을 가다듬는다

운동화 끈을 고쳐 묶는다

대지를 박차고 뛰어올라

나만의 질주를 시작해 본다


스쳐지나는 사람들 사이로 느껴지는 땀내음, 눈으로 전하는 무언의 위로. 반환점을 돌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나를 미완성이라고 부르겠다는 노랫말에서 나는 촌스럽게도 우리를 떠올리며 콧등이 시큰해졌다. 누군가 보면 반 뿐인 성공이겠지만, 나에게는 너무 소중한 성취. 그러니 나는 영광의 러너라고. 듣는 이에 따라 어떤 이야기로도 들릴 수 있는 가사지만 나는... 라디오를 떠올렸다.


노래를 들으며 창피하지만 좀 울었다. 사실은 오히려 투박하고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이런 조언이 내게 필요했구나 느꼈다. 사라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내기 위해 온갖 힘을 쓰고 오기로 독기로 무언가를 대하던 순간의 내가 좀 안타깝게 느껴졌다. 웃고 행복해지면 뭔가가 무너질 것 같아서 마음 놓고 행복할 수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오히려 마음의 소리가 가리키는 대로 향했던 때의 내가 지금 가장 큰 뿌듯함을 안겨주고 있는데. 어차피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서 행복감을 느껴본 적도 없다.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말자. 더 많이 달린 건 더 많이 달린 것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온갖 두려움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작은 커뮤니티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따뜻한지 알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스물 몇 살의 내가, 지친 몸으로 탄 버스 안에서 운명처럼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아보면 좋겠노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은 아직도 내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차 안에서, 거리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고 탄 버스 안에서, 낯선 도시에서 우연히 귓가에 스친 말 한마디, 노래 한 자락이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덥할 수 있는지. 내가 모르던 새로운 음악가를 발견하는 그리고 그렇게 하나의 우주를 선물받는 경험. 라디오는 이런 걸 가능하게 하는 공간이다. 많은 생각들이 퇴근길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선배가 보내는 따뜻한 응원을 들으며 나는 울었다.


이 일을 해서 뿌듯함과 영광을 느끼고 싶다. 9년차가 된 지금의 내가 하는 생각은 그렇다. 오랫동안 그리고 건강한 마음으로 달리는 것이 영광이 될 수도 있다고. 선배가 후배에게 해줄 있는 가장 큰 조언과 같은 노래였다.


삶이란 미지의 길

그저 달리고 또 달리는 나를 위하여

반환점을 돌아가는 사람들

나는 여기에 멈춰

누군가에게는 미완의 실패

나는 영광의 러너

오늘 나의 풀코스


젠장 ‘나는 영광의 러너’ 부분에서 항상 눈물이 솟는다.


아래는 선배의 두번째 싱글 <숲> 의 ’능소화‘ 가사.


나는 더디 피는 꽃

찬란한 봄은 가고

더운 여름볕에 잠 깨어

비로소 눈 뜬다

모두 사라져버린

지금이 나의 계절

나의 모든 힘을 모아서

꽃을 피울게

향기가 다 사라진

지금이 나의 계절

오래도록 곁에 남아서

널 위로할게


위로가 필요한 날, 내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날, 두려움으로 가득차는 날, 하늘이 내게 태풍과 비를 퍼붓는 날. 그런 날 펼쳐 들으면 좋을 노래.


제 아무리 하늘이 나를 방해해봐라. 나는 언제나 나에게 완성일 것이고, 또 영광일 것이다.


삶이란 미지의 길 위에서 나는 능소화처럼 언제나 피어나고 또 이길 것이다.


https://youtu.be/K4nL33VAFKU?si=fmP5OKFLrczdWT0q

https://youtu.be/zmcRy8i4p-E?si=Ak4M0lDsvM5a_d3A











매거진의 이전글 2024년 그 시작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