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탱볼 같은 삶에 대하여
어릴 적 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나와 동생들은 양 손에 들려올 과자 더미를 기다렸다. 초콜릿, 사탕, 빵.. 보통 애들 입맛이 그렇듯 다양한 과자 더미들 중 우리의 선호 순위는 대개 비슷했다. 가위 바위 보를 통해 누가 무엇을 가져갈 것인지 정하곤 했다.
그렇게 과자들의 행방이 정해지고 나면 그 이후 섭취 패턴은 세 남매가 모두 달랐는데, 나는 웬만하면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편이었고 동생들, 특히 둘째는 맛있는 것을 아끼고 아꼈다 맨 마지막에 먹는 쪽이었다.
한편 대학 입시를 겪으면서는 재미를 유예하는 버릇이 생겼다. '쓸 데 없는' 곳에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해야 할 일'로 여겨지는 것을 우선적으로 했다. 좋아하는 TV 프로그램도 영화도 걱정과 미래에 얻을 행복 앞에 유예됐다. 그렇다고 그 유예된 시간에 딱히 공부를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지금 이 순간 놀고 있지 않다는 생각만으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매 순간 나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기대했다. 이 긴 공부를 끝내고 나면, 기다렸던 것처럼 타다- 하고 즐거움이란 게, 재미란 게 생겨나겠지! 그 날의 기쁨을 위해 즐거움은 최소로 걱정은 이빠이, 현실을 버텼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입학해보니 재미 역시 노력을 통해 얻어야 했다. 즐거움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가는 거였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할 때 행복한지 알고 있는 친구들이 대학생활 역시 즐겁게 했다. 그들은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를 알았고, 어떤 순간에 행복하고 즐거운지 잘 알고 있었다.
영어 문학 수학 과학 역사.. 뭐 별 쓸모도 없는 축척이나 근의 공식 같은 건 미친듯이 외웠으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는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곳저곳을 기웃대며, 그때부터 취향과 색깔을 찾기 시작했다. 공부와 마찬가지로, 나를 잘 들여다보니 내가 보였다. 나를 공부하다보니 나를 잘 알게 되었다.
알고보니 나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할 때 즐거운 사람이었다. 글을 읽고 쓸 때 즐겁고,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회의를 하는 순간에 에너지가 넘치는 성향이었다. 숫자를 싫어하고 답이 정해져 있는 객관식 문제들을 어려워했다. 고전문학보다는 현대문학이 좋았다.
문학에 답은 없으니 자유로운 해석을 해보라- 요구하는 교수님들을 좋아했다. 언어학을 매우 어려워한다. 고흐와 호퍼를 좋아한다. 미술 사학에 대한 동경이 있으며 사실 모든 예술에 그러한 동경을 지니고 있다. 여행을 좋아한다. 계획되지 않은 여행길을 선호한다. 패턴을 반복하는 것을 힘들어하며 눈물 빼는 스파르타식 교육 방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등등.
어느정도 나라는 인간의 패턴과 사용법을 숙지한 지금의 나는 더 이상 즐거움을 유예하지 않는다. 재미란 건 유예되는 순간 사라져 버리고 마는 공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3 야자 시간, 화장실 난로 위에 앉아 몰래 PMP로 영화를 보며 킬킬대던 그 순간의 즐거움 같은 건 지금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행복이 있다. 그것이 크건 작건, 비싸건 공짜이건 마찬가지다.
신날 때 맘껏 신나고 슬플 땐 차라리 바닥을 쳐버리자. 그래서 요즘의 나는 이렇게 산다. 앞으로 닥칠 슬픔을 걱정하며 한발 한발 위태롭게 웃기보다는, 신날 때 깔깔대고 웃고 그 뒤에 올 슬픔의 폭풍도 온몸으로 감당하기로 했다. 무너질 것 같은 순간에, 분명 나를 지탱해 줄 누군가가 있겠지. 그 믿음의 힘은 크다. 한바탕 울고 나서 다시 바닥부터 시작하면 될 일이다.
아무튼 그런 탱탱볼 같은 삶을 살기로 했다.
알게 뭐야, 지금 내가 신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