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io, Oh Viva Ra Dio
시간은 어느덧 흐르고 흘러 입사한 지 벌써 삼년 차.
느낌상 혼자서 뭘 맡기엔 애매하지만 또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그동안 뭘 배웠냐 소릴 듣기 쉬운 연차. 1-2년 차 때는 말 그대로 '나의 것'이라는 게 있기 힘들기 때문에 과정에 대한 분노가 대부분이었다면, 지금은 나에게도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들이 생겼다.
뭔가 차근히 해야 할 것들을 해온 것 같으면서도, 막상 돌아보면 나는 왜 이렇게 아는 게 없나 싶은 연차. 하나의 세계를 구상하고 쌓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한편 즐거운 것인지를 깨달은 시간. 새로운 게 즐겁고 하나하나 배워가는 게 너무나 재밌는 요즘. 그렇게 나의 매일은 전부 목요일이 되어버렸다.
시사, 정보, 경제, 라디오 드라마, 다큐, 민방위를 경험하고 음악채널로 건너온 지 이제 5개월 정도. 넘어오고 나서 가장 큰 차이점은 방송을 만드는 방식에 있었다. 시사 채널에서는 아무래도 정보를 전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정보나 스토리(드라마)를 전달하는 데 더 신경을 써야 하는 반면 음악 채널에서는 같이 이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 전에는 공유할 법한 지식과 경험을 제작진이 발굴하여 소개하는 방식이었다면, 이 곳에서는 청취자의 글과 반응이 그 시간의 재미도를 결정하는 매우 큰 요소가 된다. 물론 그것을 채택하는 방식에서 여전히 제작진의 시각이 반영되기는 하지만은 그 정도가 현저하게 다르다.
이 둘이 갖는 재미는 그 뉘앙스가 완전히 다른데, 예를 들어 어떤 때는 1라디오와 같은 단호하고 일관적인 시각이 어떤 방송을 더 재밌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사안에 대한 가치판단이 들어가야 하는 경우는 모두가 달려들어 자신의 의견을 있는 대로 공유하다 보면 쉽게 난장판이 되어버린다.(예로 네이버 댓글판) 때문에 다큐나 시사 프로그램 같은 경우는 때문에 청취자들의 반응을 충분히 모니터링하고 가장 '올바른' 방식으로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프로듀서가 좋은 프로듀서일 것이다.
2FM의 경우도 물론 기본적인 틀에서는 똑같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청취자'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음악과 사연, 이에 대한 청취자 문자와 댓글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참여와 반응이 재미 요소를 크게 결정해버린다. 케미가 맞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 더 즐겁고 현웃 빵빵 터지듯 말이다. 그래서 어느덧 제작진의 역할에는 이 '케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포함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결국 음악 프로그램의 제작진은 훌륭한 파티플래너이자 모임 주최자이자 놀이판 만듦꾼이 되어야 한다. DJ와 청취자, 그리고 게스트가 한 데 모여 즐겁게 수다를 떨 수 있는 소재를 던져주고 그 안에서 즐겁게 놀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러다 보면 가장 큰 재미는 그 안에서 웃음 신이 강림하여 던져주는 우연한 씨앗에서 터져 나온다. 그렇게 웃음은 역사가 되고, 사실 우리는 프로그램 그 자체보다는 그 역사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내가 소개해주고, 그렇게 이 놀이판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이 같은 음악을 함께 듣는다. 이렇게 라디오는 인터넷처럼 비교적 공평한 커뮤니티다. 최신이 아닌, 하지만 좋은 음악들이 나오고 핸드폰 가게나 음악 방송에서 많이 나오지 않는 음악들도 종종 소개된다. 때로는 멜론이나 벅스에 없는 음악이 나오기도 한다.
수많은 콘텐츠에서 음악을 다루고 훨씬 더 히트를 치기도 하지만 여전히 음악이 주인공이 되는 곳, 음악을 소중하게 다루는 대중매체는 라디오가 제일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그 자리를 요즘은 유튜브나 다른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 취향 선곡 어플이 대체하고 있기는 하지만 라디오에는 여전히 음악과 음악 사이를 잇는 뉘앙스와 이야기가 있다.
한 곡이 소개되는 과정, 누군가의 이야기가 노래와 함께 나에게 와 닿는 그 사이, 감정, 여운.. 그런 것 말이다. 같은 것을 공유하는 기분, 그 시간 그 장소에서의 유일한 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시간을 음악으로 박제해버리는 기분. 그래서 다음에 그 곡을 듣게 되면 그 시간의 공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 나는 그것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연출과 비슷한 느낌의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덕업상권>을 계속해 오면서도 느끼는 점이다. 사실 현실적으로는 힘든 과정도 너무 많지만 결국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지금껏 내가 함께 해 온 역사와 시간, 그리고 '같이 놀고 있다'는 기분이다. 아무리 우리끼리 즐겁더라도 '함께' 즐겁다는 생각이 없다면 이만큼 유지되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청취자들의 반응과 조언과 제안들 하나하나가 프로그램에 반영되어 바뀌어나가며 섞여 들고, 그 과정에서 나 스스로도 성장하는 것을 보는 일이 너무나 즐겁다.
그러니까, 흔히 클리셰처럼 이야기하는 이 프로그램은 청취자, 시청자들의 것입니다. 하는 말이 비록 오글거려 토가 나올지언정 정말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음악가나 미술가가 내 손을 떠난 이후의 작품은 그대들의 것입니다. 하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그것보다 모든 예술적 사물의 의미를 잘 설명한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PS. 최근 <굿 플레이스> 시즌1, 2를 새벽 7시까지 뜬 눈으로 정주행 해버렸는데(너무 재밌어서) 이 곳에 나오는 설계자는 좋은 청취자이자 좋은 제작진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