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떻게 지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저벅저벅. 샌들에 통 넓은 청바지 차림이다. 들어가기 전. 가방에서 주섬주섬 바디 미스트를 꺼내서 손목과 귀 밑에 찍는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안녕! 잘 지냈어? 하하. 전 잘 지냈어요. 며칠 남았어? 36일이요. 이야. 진짜 별로 안 남았네. 난 아직도 병역 판정 바뀌었다고 했을 때 생각나는데. 그러게요. 벌써 4년이나 지났어요.
이야기가 무르익는다. "내가 태워다 줄게. 그나저나 오늘 뭐 하다 왔니?" "사람들이랑 뭐 좀 하다 왔어요. 마지막 학기에 사람들이랑 어울릴만한 일이 있어서요." "야. 그래도 그런 기회가 있으니까 얼마나 다행이야."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뭔가 제가 준비해서 가서 서로 대화하고 친해지는 게 더 뿌듯한 것 같아요." "유동이가 일은 참 믿음이 가기는 하지." "하하."
오랜만에 만난 이 사람. 만난 이유를 알게 됐다. 서로 또 다른 이야기를 하다 집에 갈 시간이 됐다. 그냥 저 혼자서 갈게요. 버스 타고 가도 될 것 같아요. 노트북도 뭣도 꺼내지 않은 채로 그렇게 한 시간 반을 이야기한다. 가장 중요한 질문도 빼먹지 않는다. “요즘도 글쓰기 꾸준히 하지?” “당연하죠. 거의 재능기부지만.” 농담 같은 문답을 끝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선다.
버스를 탄다. 휴대전화를 킨다. 습관적으로 들어가는 인스타그램. 별 신경 쓰지 않는 것들도 무의식 중에 확인한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의 몇 근황을 기계적으로 읽고 액정을 끈다. 혼자 앉은 좌석. 창가 밖으로 시선이 향한다. 버스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건 사람들이 빠르게 샤샤샥 지나간다는 의미다. 하지만 다들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 날의 베를린이 생각난다. 그냥 단지 비 맞으며 돌아다녀도 기분 좋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단지 구경만 하고 다녔는데도 즐거웠다. 그리고 가끔 요즘도 그런 기분을 느낀다. 구경이라고 하는 게 그렇게 엄청난 효과가 있었나. 27년을 살고 느낀 점은 세상과 나의 공통점이 없는 듯 있다는 것이다. 나도 저럴 땐 저랬었지 싶다. 오지랖인지 감정이입인지 모를 선에서 함께한다는 것이 즐겁다는 걸 체감한다. 금세 머리 한 편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떠오른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으려면 사실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 잘 알고 있지만 애써 무시하기로 한다. 그동안 열심히 해왔던 것이 의미가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나는 한 편으로 경쟁을 즐겼던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20대가 되고 나서는 다른 사람과의 대비를 피하지 않고 좋아했다. 물론 이게 열등감의 발현인 건 과거의 나나 현재의 나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열심히 안 하다가 늦게서야 미친 듯이 매달린 사람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몇 위기를 어찌어찌 넘긴다. 이 시간이 지나면 뭔가 다르겠지 싶지만 거의 대부분 반복된다. 좋은 사람들과 이상한 사람들이 생긴다. 뭔가를 느끼고 다시 배우게 된다. 그렇게 서서히 쌓였던가. 세월이 그냥 흘러가지는 않았다는 것이 갑자기 위안이 되기 시작한다. 간단했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으면 안 됐는지. 단지 제대로 살아보는 것이 바람이었다.
문득 그 바람이 이 버스를 태워준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즐거운 사람들, 하하 호호 웃는 사람들의 얼굴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거대한 무언가가 필요했던 나. 사실 알고 보니 사람들끼리 영화 보고 각자의 감상을 나누는 모습만 봐도 즐거워했다. 뭔가 다를 것이라 생각했다. 막상 도착하니 별 것 없었다. 근데 그 별 것 없다는 것이 전부였다. 어디론가 향하는 길. 내가 돌아버려 시야가 흔들린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세상이 휘청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휘청거림도 나쁘지 않은 걸. 나 역시 누군가에겐 돌아버린 사람에 속한다는 건 차치하기로 하고, 흔들리지 않으면 가만히 세상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괜찮아. 내가 어디서 뭘 하든 이해할 수 없는 인간과 사건들은 언제나 있어왔는 걸. 이제는 이게 일상이라는 걸 이해할 나이가 됐나 보다. 우스운 일이다. 나만 이렇게 돌고 있는 걸까?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나를 움직이는 힘이었다니.
일상의 감사함 뭐 그런 건 아니더라도 뭔가 즐거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문득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E같이 보이는 극 I인 나도, 가끔 덤벙 내는 나의 성격도 어쩌면 내일 더 좋은 것들을 가져다주기 위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탑 같은 건물을 올라간다. 방 안에는 빈 공간도 있다. 가끔은 문을 닫고 올라가는 일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비워놔야 새롭게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늘 비어있는 마음이 뭔가 즐거운 일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혼자 살아야 할 운명인가. 건물 안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면 두렵겠지. 그런데 그런 두려움보다 눈앞에 보일 기쁜 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제야 탑에 도착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