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어느덧 금요일이 왔다. 이 긴 레이스의 실질적인 마지막을 장식할 하루였다. 사실 별 것 없는 하루였다. 오히려 그날 당일보다 그 이후의 미래가 궁금했다. 이러려고 휴가 아껴놓은 건 아니었다. 그냥 살다 보니 한 달 치만큼 모였다. 시간이 빨리 지났으면 좋겠다고 한 250번 정도 생각했다. 실제로 시간이 빨리 갔나? 당연히 아니다. 시간 더럽게 안 갔다. 그러나 나름 유의미한 시간들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애욕의 세월. 그 와중에 잘 지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나름 약점 보완에 힘썼다. 삼촌들 사이에서 일도 배웠다. 꼭 드릴과 몽키스패너, 파이프렌치와 그냥 렌치가 뭔지 알고 싶었는데 좋은 사람들 곁에서 많이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이 일을 시작으로 시간 빨리 갈 수 있는 것들은 다 했다. 사람들도 만나보고. 그 와중에 화나는 일도 있었고. 즐거운 것도 있었다. 어찌어찌 생각지도 못한 일은 늘 있었다.
역시 사람 일이 예상대로 정확히 맞아떨어지리라는 법은 없다. 늘 있던 변수들. 노트북이 고장 난 다거나, 에어팟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찾는다거나 하는 건 이제 놀랍지 않다. 돈 나가는 거 솔직히 날짜 다 와가니까 별 일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생활필수품 미리 산 셈 치지 뭐. 역시 사람들 간의 문제가 제일 크다. 별별 사람 다 있었지. 그중 최고는 '라면 먹는 소리'에 대한 에피소드다.
어떤 사람이 있었다. 덩치는 컸다. 키는 나랑 비슷했다. 키는 나랑 비슷한데 덩치가 크다는 건 양옆으로 비대하다는 의미이다. 매일 같은 반팔티를 입었던 남자. 나름 할만한 것 다 대학에서 하고 노예생활을 시작한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내가 아는 누나들 몇몇은 이미 결혼을 하고도 남았다. 아이가 있는 사람도 있는 걸? 하지만 이 분은 뭔가 달랐다. 뭐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만 좋으면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 외모? 그게 뭐가 중요해? 외모는 레이저 제모 같은 거라 관리만 하면 다 나아질 수 있다. 나도 피부과 열심히 다닐 거다. 살? 그건 빼면 되는 일이다. 같이 어떤 것을 일하는 입장에서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비단 외적인 것 때문에 고통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 히스토리 같은 거 굳이 쓸 필요가 없다. 중요한 건 '이 날 어떤 일이 있었는가'에 대한 것일 테지.
의료원 내 안 쓰는 공간이 있었다. 평소에 에어팟을 끼고 있는 나. 영화를 보거나, 외국인이 영어 하는 영상을 보고 있다. 그 형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라면을 먹고 있었다. '후루루룩' '쩝쩝'소리가 들린다. 뭐 라면 먹을 수도 있지. 근무지 전세 낸 것 아니다. 하루 이틀은 참을 수 있었다. 라면 먹고 용기 안 버리는 것까진 괜찮았다. 그러나 그날은 좀 달랐다. 에어팟 배터리 충전을 못 해왔다. 띠리링 소리가 들린다. 에어팟을 빼는 나. 책을 주섬주섬 꺼내서 읽는다. 그 형이 다시 라면을 먹었다. 옆에 있던 동료에 따르면 내가 이때 한숨을 크게 쉬었다고 한다. 아무튼 라면 먹는 소리가 들린다. 후루루루룩. 키햐아아아아. 한숨 한 번 더 쉰다. 작정한 나. 이렇게 적나라하게 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형. 드시는 건 좋은데요. 조용히 드셔주세요. 다 같이 있는 거잖아요?"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 소리에 시달릴 것 같았다. 최대한 젠틀하게 말한 나.
반향은 아예 달랐다. 길길이 날뛰었다. “유동 씨. 우리 서로 며칠 안 남았죠?” “네.” “우리 서로 끝나면 서로 아는 척하지 맙시다.” 뭔 말을 못 하겠네. 순간 당황했다. “네. 잘 생각하셨어요. 형이 저한테 했던 막말 중에 제일 옳은 말이에요” “넌 항상 똑같았어. 날 항상 애새끼 취급했지.” 어이가 없던 나. 여기서 지기 싫었다. “형. 진짜 다른 건 모르겠는데 이건 못 참겠네요. 형 저 지금 27살이에요. 27살인 애가 지금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라면 좀 쩝쩝대지 말라고 하는 게 코미디죠 이게. 아니 7살이랑 11살도 이런 걸로 대화 안 해요.” 내 말을 안 듣는 것 같았다. 자기 말만 하던 그 사람. “아니 무슨 라면 먹는 걸로 뭐라 하냐? 너 맨날 아침에 페브리즈 뿌리는 거 이유가 뭐야? 나한테 냄새나서 아니야? 그리고 그거 나 가끔 맞는 건 아냐?” “형. 다 같이 있는 거잖아요. 형 혼자 공간 쓰는 거 아니잖아요. 아니 드시는 건 좋은데 소리 안 내고 드셔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페브리즈를 뿌리든지 말든지 형한테 뭐라 한 적도 없는데 뭐가 문제인 건가요? 저는 형 다 존중하는 선에서 말씀드렸어요. 이 공간 허락 제가 받은 거 아시죠? 그냥 나가주세요. 형 뒷정리 하지 마시고.” “네가 하는 존중이랑 내가 아는 거랑 다른 것 같기는 해. 그리고 난 어딜 가든 항상 존중받아야 할 사람인 건데? 내가 알아서 나갈 거야. 네가 쫓아낸 게 아니라.” “아 알았어요. 형 말이 옳으니까 그냥 나가주세요.” “넌 그냥 기본적으로 애가 너 일만 잘하면 다인줄 알아.” “맞아요. 제 일만 잘하면 다죠. 그거만큼 좋은 게 있나요? 나가주세요.” 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같은 공간에 동료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그렇게 쌓여있던 스트레스를 분출한다. 방에서 내보낸 나. 옆에 있던 동료가 “정말 잘하셨어요.”란 말을 한다. 이성이 돌아오는 와중에도 “내가 과했을까” 생각이 단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속이 시원하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렇게 그냥 지나갈 것 같았다. 그날이 목요일이었다. 금요일은 얼레벌레 지나간다. 근무지 사람들 모여있는 단톡방에 메시지 하나가 올라온다. “제가 제 식대로 스트레스를 풀 테니 놀라지 마시길.” 뭔가 싶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내 일상을 보내기로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던 주말. 영화 리뷰를 써서 토스하고 책을 읽고 게임을 했다. 월요일 아침. 내가 먼저 톡 보낼 일 아니면 카톡 자체를 안 켜는 나. 그날도 메시지 확인이 느렸다. 같이 일하는 동생과 마주친다. 괜히 나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게 있을까 싶었는데 대화가 시작됐다. “누구야. 이러저러한 일인데 내가 괜히 신경 쓰이게 한 거면 미안.” “아뇨. 괜찮아요.” 그런데 그 동생 표정이 이상했다. 뭔가 격려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늘 하는 카톡 확인. 단톡방에 카톡이 쌓여있다. 메시지가 와 있다. “유동 선배님. 관심병사 xx이가 대가리 오지게 박습니다. 이번 기회에 연가 좀 쓰십시오” 라며 메시지를 남겨놓았다. 그러고 모든 병동의 일을 자기가 다 했다(고 믿었다). 병동 특성상 폐기물 버리는 박스가 늘 필요한데, 지하 강당에 수많은 박스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광경을 봤다. 그러니까 담당자님도, 직원분들도 로비에 박스가 있는 걸 다 본 셈이다. 물론 어떤 것이 문제인지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이렇게 애같이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모습에 난 질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잡아다가 이걸 두들겨 팰 수도 없고. 가까스로 이성을 잡는다. 동료들이 말한다. "형. 아무리 그래도 형 직접 말하시는 건 좀 아니었어요." "맞아. 유동아 다른 사람 통해서 말하는 것도 좋았을 것 같다." "아니 그럼 제가 27살인데 26살인 사람한테 30대 형이 라면 먹다가 쩝쩝거리는 걸 다 말해야 되는 거예요? 이거 좀 아니지 않아요? 고충도 고충 나름이지!" 사람들이 웃었다. 왠지 모르게 사람들이 위로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인생이 순탄하게 흐르지 않는 것인가. 아, 이 양반은 이렇게 깽판을 치고 그전에 막말을 해도 주위 사람들에게 사과 한번 하지 않고 그대로 사회인이 됐다. 아. 사과 한 번은 했다. 단톡방에 한 줄.?
이 일은 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바로 속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있구나!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런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23살 때의 일이다. 온갖 치욕을 다 당했던 시기. 그때는 판정이 바뀌기도 전이었다. 혼자 이 등급을 바꾸려고 계획만 하던 때였고 그러려면 당연히 생활비가 필요하다(물론 사고 싶은 것도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나는 '거품이 걷혔다'라고 보는 게 옳다. 지금 병원에서 일하면서 이런저런 잡스킬이 늘었지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디 가서 일하고 단체생활 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뭔가 있어 보이는 대학생활 경험치에 비해 나의 역량은 초라했고 약점을 그대로 노출했다. '나는 뭐 하는 놈인가' 의구심이 들었던 나. 일을 못하니까 못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다. 돈을 버는 일도 좋았지만 나는 뭔가 세상에게 도전해서 나의 역량을 보여주고 싶은 그런 자격지심이 있었다. 이번 근로장학생 일은 어떤 회사였다. 공공기관이었다.
어디서 들어본 기관이다. 주변인 들 중 몇몇이 여기서 일했었다고 했던 것 같다. 일단 모른 척해야지. 이 전략은 유효했다. 일을 진짜 못했다. 지금 다시 보면 뒤통수 한방 후리고 싶을 정도. 아직도 생각나는 기억이 있다. 파일철이 있다. 문서작업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서류들이 회사 속성 상 굉장히 중요했다. 그런 서류를 정리하기 위해 어느 파일철에 어느 라벨지를 붙여야 했다. 그걸 못했다. 진짜 간단한 일이었는데. 그리고 잡 실수가 진짜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빼곡한 느낌? 그러나 가장 하이라이트는 그 외에 있었다.
그분은 키가 큰 분이었다. 일도 똑 부러지게 잘하는 분인 데다가 결혼을 앞두고 계셨다. 약간 내가 되고 싶은 사람 같은 느낌? 가끔 나태해질 때마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분 기억이 나서 동기부여를 얻는다. 그때 살짝 무섭다고 느낄 정도였다. 어느 날. 그 선임연구원님이 날 불렀다. 조마조마했던 나. 위에서 서술한 라벨지와 관련된 문제를 지적하셨다. 얼굴이 빨개진다. 창피한 나. “유동 씨. 이럴 땐 죄송하다고 하는 거예요. 경험은 많은데 왜 그래?” 죄송하지 않아서 그렇게 말 안 한 게 아니다. 너무 창피해서 말이 안 나왔다. “유동 씨. 일 집중할 때 중얼중얼 거리는 거 알아요?” “네?” 얼굴이 더 뜨거워진다. 그리고 귀를 잘라버릴 것 같은 말을 했다. “유동 씨 중얼중얼 거리는 거 다 들려요. 가끔 콜라 먹고 끄으억 하는 소리도 그렇고.”
귀를 잘라버리고 싶었다. 내가 정말 그랬다고? 텍스트로 끄으억 이라고 적긴 했지만 그건 얼핏 들었을 때 트림이라고 생각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난 위가 굉장히 안 좋다. 이 이유로 헛구역질이 심하게 올라온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러는데, 나 혼자서 그걸 끄윽 참으면 그런 소리가 올라온다. 사실 중요한 건 내 상황이 아니다. 그렇게 들리는 것과 실제로 그런 것이 뭐가 다른가?라는 점이다. 뭐 내가 병 때문에 그러든 아니든 간에 피해를 주면 준 거다. 아직도 그때 생각만 하면 창피해서 이불을 발로 찬다. 대체 왜 그런 게 피해가 될 거라고 생각을 못 했지? 사람들이랑 함께 있으면 관심 없는 것 같아도 다들 알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23.9살의 나. 그때 선임연구원님이 “유동 씨 몇 살이죠?”라고 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23살의 나는 그렇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갔다. 그때 24살도 늦었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나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의미 없는 건 없었다. 원래 과거란 다시 생각하면 웃긴 것이다. 난 그 후에도 그 기관에서 자잘한 실수를 했다. 다른 주임연구원, 연구원님들의 눈치를 열심히 봤고 나름 최선을 다했다. 서류 작업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고 굉장히 중요한 주식인 ‘복사기 쓰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27살의 내가 보기엔 아직도 아쉬운 것이 많다. 그런데 뭐 어쩌겠어. 돌이킬 수 없는걸. 아 이미지 상한다. 자존심 상해서 이 글 쓰며 혼자 웃었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과 미련이 31살의 아저씨한테 소리 지르는 나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누군가는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한테 지적하는 내가 예의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고 나 역시 여전히 뭔가 부족할 테지만 그래도 나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창피한 흑역사를 긍정하고 싶다. 분명한 건 세월이 지났고 난 그거보다 나아졌다는 것이다(그리고 라면 시끄럽게 먹는다고 지적받는 것보단 나음). 이 결과를 요즘 들어 느낀다. 현타가 몰려올 때가 있지만 그래도 그런 경험들이 의미가 있던 것이다.
지금 당장은 부끄러울지 몰라도 우리 인생은 아직도 애틋한 순간이 더 많이 남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당연히 앞으로의 미래가 지금 이 순간보다 길 것이다. 갑자기 영화 생각이 난다. 홍상수 감독의 <지금은 맞고그때는 틀리다>다. 영화는 냉정할 정도로 우리 일상을 조명하고 있다. 1부와 2부에서 겪던 일이 비슷했던 ‘지맞그틀’. 이 두 가지의 사건이 연이어 제시되면서 반복과 차이를 보여준다. 이 두 행동은 별 것 없다. 그냥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꼬시는 일이다. 그러나 먼발치서 보면 정재영 캐릭터가 김민희 캐릭터를 꼬시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뭔가 진심이 담겨있다. 더 행복하고 싶어서 이런 일들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게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하게 되는 것. 반복했기 때문에 더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 것. 더 나아지고 싶다고 스스로 믿는 것. 지루하고 창피하고 꼴사나운 일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살 수 있는 것. 그런게 우리가 보내는 세상과 나의 관계 아닐까 싶다. 생방송이 연이어 있는 마라톤을 생각해보자. 생각만해도 버겁다. 또 어찌저찌 잘 살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어떤 하루를 보냈건 고생 많으셨다. 단지 더 잘 사는 걸 소망했을 뿐이다. 그럼 그거면 된 것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