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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은 무엇인가요

원더풀 라이프

by 유동


아름다운 기억이라.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의 파리. 나는 땀 뻘뻘 흘리며 베르사유 궁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원래 다른 사람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가장 먼저 순서에 두는 것 같은데 난 일주일 과정의 중간즈음에 뒀다. 유럽여행 24일 차쯤 되면 웬만한 위기가 닥쳐도 당황하지 않게 된다. 휴대전화 배터리가 깜빡깜빡한다. 한국 지하철보다 외국 지하철 더 많이 탄 아들이 걱정됐던 우리 집. ‘배터리 떨어지면 어떡하냐’라는 걱정이 있는 것 같지만 억지로 간 보조 배터리를 믿기로 한다.


하지만 모든 여행이 순리대로 될 리는 없다. 깜빡대는 보조 배터리. 케이블을 이리저리 끼워 놓는다. 그 당시 휴대폰이 좀 예전 거라서 배터리도 금방 단다. 파르르 꺼지는 핸드폰. 베르사유 궁전 뒤 공원까지 알뜰살뜰하게 여행을 끝냈기 때문에 당장 비상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뭐 오스트리아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갈 때는 기차를 놓친 적도 있는걸? 어차피 별 일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숙소 찾아가는 일은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휴대전화가 꺼진다. 지도를 주섬주섬 꺼낸다. 나 영어 잘하거든? 지하철 노선도를 더듬더듬 꺼낸다. 여기로 가면 되겠지. 외국인들에게 어떻게든 대화를 시도한다. 오케이. 저 노선 타면 되는 거 아니야? 승강장 앞에 섰다. 아무도 없다. 엥? 무슨 일이지? 안내판이 있다. 프랑스어로 쓰여있고 그 아래에 무언가가 있다. ‘이번 주에 이 노선은 공사 중입니다. 다른 노선으로 돌아가세요.’


큰일 났다. 어떡하지? 이 노선이 막혔다는 건 예상외의 일이다. 원래 같으면 휴대폰을 켜서 구글 맵을 들어가 노선을 찾아볼 텐데 그마저도 꺼졌으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이탈리아-프랑스로 넘어가면 불친절한 사람들은 불친절하다. 왠지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 이탈리아에서 지하철을 놓쳤다는 좌절감보다 더하다. 어떡하지? 일단 노선도에 켜서 아무 지하철을 탄다. 파리의 치안이 그렇게 안 좋은 건 아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린다. 옆에는 죄다 외국인이고 벽에는 낙서가 있다. 갑자기 오줌 냄새도 나는 느낌이다. 나 여기서 국제미아 되는 거 아니겠지. 급기야 한국과 프랑스의 시차 차이가 불현듯 튀어난다. 13시간? 이거 집에서는 새벽이라는 거 아닌가? 어디로 가야 하는 거야? 저기 있는 저 사람들은 내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솔직히 아직도 프랑스 무섭거든. 어떡하지? 출구에 내려 무작정 걷기 시작한다. 사람 많은 쪽으로 가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그렇게 걸어서 도착하니 개선문이 보인다. 개선문이면 유명한 스폿이니까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이글대는 태양. 내 몸 뒤에 태양이 있는 것 같다. 등 뒤를 돌아보기 싫었다. 그전에 인종차별이랍시고 시비를 거는 놈 몇 명이 있어서, 내 뒤에 누군가가 나를 비웃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는 길 잃은 그 상황을 마주하기 싫었다. 무작정 걷는 나. 개선문 근처에 도착헀다. 근처에 있는 꼬마에게 인류애 끝자락을 발휘해서 한번 더 묻는다. 여기, 지하철은 어떻게 가요? 답을 얻고 걷는 나. 그래도 다 와가나 싶었다. 긴장이 풀리니 뒤를 돌았다.


그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보였던 건 에펠탑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각종 미술관이 더 궁금했던 나. 거기부터 갔기 때문에 에펠탑을 볼 생각을 잘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하고 싶지 않았던 쪽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왠지 에펠탑에 오면 여행 목적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게 무섭기도 했다. 정작 그거 때문에 왔는데 말이다. 지난 일이 속상했던 나. 다시 시작한다는 그 마음을 준비한 채로 맞이하고 싶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이 몰려온다. 이 순간을 위해 24일을 보냈다. 그리고 남은 4일과 여행 후의 삶이 있다. 어쩌면 이 이후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었다.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다 여기에서 왔던 것 같다. 인생은 내가 만드는 쪽이 맞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 뭐든 결과물이 내 것이 된다. 받아들이기엔 어렸던 때, 에펠탑 덕에 이해했다. 다행이다.


이 일이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으로 남아있다. 뭐랄까 그전에 있던 일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스타트로 아주 적합한 일이었고 내가 나만의 세상을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듯하다. 여러분에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인가? <원더풀 라이프>의 질문이 별안간에 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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