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쩌다 악당이 되었나

솔직한게 죄라면 난 하나도 안 미안해

by 유동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아 결론을 내렸다. 나는 역시 글러먹었다.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규범이라고 하는 것은 집단에서 가깝거나 먼 부류를 구분 지을 수 있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주류에 끼지 못하면 집단의 악역이 되어 소외된다.


villain. 악당이라는 뜻이다. 보통 악당이라는 단어는 두 부분에서 많이 쓰인다. 일상에서는 못난 이를 조롱하는 쪽에서 많이 쓰인다. 예를 들어 '독서실 빌런'이라 함은 독서실에 발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의미한다. '지하철 빌런'이라고 하면 갑자기 느닷없이 욕을 한다던가 하는,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사람을 포함한다. 다른 부분에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쓰인다. 이 경우 보통 선역과의 대립에서 악당이 기능을 한다. 일반적인 영화나 드라마에선 그런 축에 속한다. 보통 슈퍼히어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런 빌런들이 역할을 한다. '조커', '타노스', '리들러' 등등 선역과 악역이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는 곳에서 이는 더 두드러진다. 이 악당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은 감독의 연출력에 따라 달려있다. <다크 나이트> 조커처럼 배우의 명연기로 기억에 남는 방법도 있다. 근데 이 방식은 반대 측면에서도 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바로 선역이 얼마나 좋은 인물로 묘사되나에 따라 달려있다. 앞에서 언급한 <다크 나이트>에서도 이 연출은 빛을 발한다. 몸 안 사리고 사람들을 구하는 브루스 웨인의 모습에서 조커와 대비되는 배트맨의 선함을 우리 모두가 느끼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 따뜻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사는 데에 악당이 존재한다. 보통 긍정적인 에너지를 준 사람에게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세상에는 온기를 주는 사람이 많이 있다. 온기는 중요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온기는 사람을 살게끔 도와주는 양분이다. 인생은 모름지기 실패의 연속 아닌가. 이 비극적인 세상에서 나 스스로를 오롯이 서있게 하려면 역시 타인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원래 다른 사람들이랑 상호작용하며 살고 있다. 좋은 에너지를 주는데 익숙한 사람은 이런 상호작용에서 긍정적인 바이브를 주는데 익숙할 것이다. 좋은 사람들은 보면 항상 하하 호호 웃으며 상대방에게 웃음을 준다. 이런 인간들은 항상 보면 무리 지어 다닌다. <다크 나이트>에서 브루스 웨인의 파티장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인기 많은 사람들이라고 적이 없을 리는 없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멀리 떨어진 사람들은 뭐랄까 결함이 큰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몇 있다. 당연한 이치다. 매번 내가 아닌 우리가 잘되길 바라는 사람이 이기적인 사람보다 훨씬 멋있기 때문이다. 과연 주인공으로 서있기 충분하다. 왠지 자존감 높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다시 내린 결론 역시 간단하다. 난 확실하게 글러먹었다.


난 이 좋은 에너지를 주는 사람들에게 장식품마냥 있기 싫었다. 왜 이렇게 반골기질이 있는 걸까? 내 주위에 문제가 있어서일까? 아닐 것 같다. 우리 엄마 아빠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뭐 다른 집안의 부모들처럼 내가 자라면서 잘한 것 못한 것 있을 테지만 솔직히 난 별로 신경 안 쓴다(지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나의 미래다). 문제 있는 건 나였다. 엄마,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고무공 하나 주면서 운동장에서 공 차고 놀라고 했었다. 아빠는 나의 인간관계가 걱정되어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낸 적 있다. 선천적인 것도 부모님과는 좀 무관한 것들이 몇 있는 것 같다. 난 운동능력이 땅바닥인 반면 아빠는 동네 조기축구회 축구선수였다. 운동을 안 하니까 성장기 때 키가 클 일이 적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심지어 엄마는 내가 밤늦게까지 눈 떠있는 걸 볼 때마다 자라고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 아빠는 나의 흑화를 유발한 사람이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면 뭐랄까 가슴이 두근대는 그 느낌이 너무 싫었다. 이것 때문에 항상 문제를 만들고 다닌 느낌이다. 이 덕에 몇 사람들은 날 특이하다고도 했고, 돌아이라고도 불렀다. 잘못됐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아니 사실 사람들과 엮이는 방법을 아예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모난 데가 많아서 망치를 수도 없이 맞는다. 서서히 쌓이는 상처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몇몇에게도 버림받는다. 갈등이 많아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쌓인 게 많아졌다. 왠지 시원하게 누군가에게 악담을 쏟아낼 때가 강박이 되어 계속 생각났다. 반대로 이 사람에게 저런 말 못 했다 싶었다 싶으면 후회한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후회하는 일이 있긴 하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할 때 스스로 구멍을 파 들어갈 정도로 일상을 갈아 넣으면, 그러니까 그만큼 부끄러워하면 되는 일 아닌가. 좋게 풀지 않아도 인생에서 되는 일들이 몇 있다는 걸 믿고 있는 나. 난 이렇게 사람들 하는 대로 하는 게 싫다. 남에게 피해 주는 거 세상 싫어하는 엄마와는 다르게 난 남에게 욕 할 때 쾌감을 느끼곤 한다. 내 욕망이 중요한 셈이다.


사소한 순간보다 선명하게 남는 기억이 있다. 한창 대외활동 열심히 하고 다닐 때였다. 겉으로는 세상 따뜻한 사람인 척 하지만 내면은 달랐던 인간이 있다. 그때 했던 말.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다시 배우셔야 할 것 같아요.” 몇 년 전 학과 선배 중 나에게 “네가 왜 친구가 없는지 알겠다”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입 닥쳐. 이 사회 부적응자야.”라고 말했다. 길거리에서 시비 붙은 인간에겐 “발 닦고 잠이나 자. XX아.” 스무 살 때 페이스북으로 남을 저격했던 적이 있었다. 부당한 일을 겪어서 따돌림 비슷하게 당했었다. 그때는 아예 잡아서 두들겨 패는 게 나았다고 스스로 한 1만 번 정도 생각했다. 누구는 이런 나를 징그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쩔 수 없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가도 내가 화살표를 뿜고 싶은 이들에게 뭔가 드러내지 않으면, 그 무엇보다 내 욕망을 어떻게든 이루지 않으면 세상이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난 이기적이다. 좋은 사람들이 이끄는 무리에 끼지 못한다. 대신 뭔가 소외된 듯한 사람들에게 힘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들을 더 이기적으로 변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가끔 나에게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던 것들이 보인다. 좋은 사람은 당연히 좋지만 착한 척하고 나쁜 짓하는 인간들에겐 알레르기가 뿜어 나온다. 나는 내가 잘 살기 위해 인생을 산다. 타인을 대할 때? 나는 그 사람 자존감이 올라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 물론 그 사람이 행복하다면 그런 일도 기꺼이 감수할 의향이 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잘 되는 데에 관심 있지 그 외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를 위한 일들이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무슨 악영향을 준다 하더라도 굽히지 않는다. 난 이미 너무 변했고 이미 되돌릴 수 없다.


결국 이렇게 변한 건 인생을 살아갈 때 착하기만 한 채로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아서 이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뭐 그럼 어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 줄 수 있으면 됐지. 아. 난 이렇게 내 머릿속 안에만 살면서 사랑받길 원한다. 이렇게 나의 무례함과 솔직함에 대해서는 합리화를 하며 사랑받고 싶어 하는 건 여전한 거 보니 다시 생각해도 난 빌런에 가까운 것 같다.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반성을 선택적으로 하는 그런 나쁜 놈 말이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도 흔들리는 시간 없이 그렇게 살 것 같다. 이런 내가 착한지 그렇지 못한 지는 모르겠으나 애써 나의 한 모습을 부정하기는 싫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더 솔직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난 이 글을 통해서 여러분들 악당으로 만들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