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사는데 사랑이 전부라고 말해
가게 문을 연다. 카페였다. 팥빙수를 주문하려고 한다. 카페 안에 사람이 많았다. 옹기종기 붙어 앉아있는 사람들. 앉을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서 있었다. 팔짱을 끼고 멍하니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저번에 지나가다 쓱 봤을 땐 머리가 짧았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길었다. 옆에 누가 앉아 있었다. 나 쳐다보는 거 아닌가? 가게 문을 잠깐 나가는 동안 몇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나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닐 수도 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모두에게 관심 없다. 하지만 저번 달 누군가가 날 욕했다는 말이 기억난다. 내가 욕을 먹고 있을지도 모르고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제주는 좁다. 금세 내가 아무래도 쓰레기가 된 것 같아 탄식을 남긴다. 하지만 이 탄식은 오래가지 않는다. 난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2018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난 큰 실수를 했다. 누군가와 크게 싸웠다. 전적으로 나의 실수였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적당했다. 지금이야 시간이 지난 후에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고 그 일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만 스물둘의 나는 감도 잡지 못했다. 머리에 있는 뇌가 나머지 부분까지 생각할 틈이 없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강박증 때문인지 매일같이 그 날로 기억이 되돌아갔다. 주워 담긴 더러워서 싫었던 나. 어서 빨리 이 해가 끝나기를 바랐다. 병역문제는 해결하긴 애매했다. 학교 다니는 건 아무래도 대충 때우고 싶었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언젠가 답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먼 듯했다.
조별과제 날이었다. 그리고 그 조별과제 며칠 지나고 난 다음에는 팀으로 기획한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학과에선 흥미를 못 느끼던 나. 대외활동에서 학교 다니는 재미를 느끼는 아이러니에 직면했다. 그래도 사람 같이 살면 충분히 사람구실 할 수 있다. 지금도 내가 사람들이랑 대화를 잘하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4년 하고도 몇 개월 지난 그때는 더 못했다. 사람들과의 기본적인 의견교류도 못했던 나. 돌아보면 행사 기획단계에서 영 힘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오프라인 행사 당일날이 되면 난 홀가분해졌다. 내가 주도적으로 뭔가 할 수 있다는 느낌이 좋았다. 행사 당일. 더러운 하루를 보낸 며칠 전과 부족한 역량에 부담감을 느꼈다. 도망가는 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끝마무리라도 잘하는 게 맞지. 이런 나에게 드디어 1인분 할 때가 왔다.
하지만 행사 전날 틈입한 조별과제가 싫었다. 어찌 됐건 1인분은 해야 한다. 자료를 구해야 했다. 3학년 재학 중이었던 나. 3학년이라는 말은 조별과제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대충 하기는 싫었다. 나름 노력을 기울인다. 노트북을 켜서. 카카오톡 단톡방에 들어간 다음 이거를 찾으면 된다고 했었어. 행사 전날에는 푹 자두는 게 중요하다. 많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나의 워크에식을 방해할 수 없다. 정보를 나름 구해서 톡방에 올린다.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당시 행사날과 발표날까지는 텀이 좀 있었기 때문에 구한 자료에 ‘필요한 거 있으면 내일 구할게요!’라고 코멘트를 적었다. 뭐 이 정도면 됐겠지 싶어 내일을 기약한다.
그날 아침을 아직도 기억한다. 살짝 늦게 일어났다. 행사 드레스코드가 올블랙 코디였기 때문에 방에 블레이저가 있는지 뒤적인다. 졸린 눈을 비비며 옷을 껴입고 버스를 탄다. 이때까지 카톡창 안 열어봤다. 버스를 탄다. 목적지에 도착했다. 혹시 싶어서 노트북을 연다. 카톡이 뭐라 뭐라 쌓였다. 대충 보아하니 내가 자료를 잘못 구했나 보다. 내 정신머리에 탄식한다. 단톡방에 메시지를 남긴다. ‘아. 저 일이 중간에 껴있어서 제대로 못 보고 조사했네요. 이거 다른 분 자료 구한 셈 치고 제 부분 구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시 아니면 내일 즈음부터 다시 할게요!’라고 적었다. 행사 준비가 바빴기 때문에 제주시 중앙로 근방의 한 건물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설치한다. 일하던 도중에도 카톡 진동이 울린다. 그냥 무시하고 당시 대외활동 팀원들과 행사를 조율한다. 잠깐 쉬는 시간. 카톡창을 열어본다. 뭐라 뭐라 장문이 왔다. 아, 바빠 죽겠는데 뭐야? 조별과제 팀원이었던 한 살 아래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저기. 자료 잘못 구하셨는데요. 뭐라 뭐라 따지는 문장이 몇 문장 있었다. 이런 건 저도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어요. 자료를 잘못 구하셨으면 다시 하셨어야죠. “ 짜증이 확 난다. 아 알았다고! 중요한데 앞길을 막다니. 하지만 모든 일을 감정적으로 대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단톡방에 뜬 메시지를 1대 1 톡으로 보낸다. “내가 일이 있어서. 이거 끝나고 다시 보낼게요.” 끝나고 뭐라 뭐라 왔다. 오래된 기억. 분명히 ‘이거 일이 있어서 끝나고 다시 보내겠다’고 했다. 반말이 존댓말로 변했다. 텀이 분명 있다 하지 않았나? 다른 답장이 왔다. “아니. 하루 만에 통보하는 게 어딨 어요. 이런 거 저도 구해요.” “아니.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이거 끝내고 다시 보낸다니까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나의 무언가를 긁는 메시지가 왔다.
“대체 뭐 중요한 일이 있으셔서 이거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건 제대로 하시겠어요? 뭐 제대로 대답하는 건 있으세요? 왜 톡은 개인톡으로 보내시는 거죠?” 그전에 했던 말 그 아무거나 다 합쳐도 이 말만큼 화나는 게 없다. 4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화가 날 듯하다. ‘그건 제대로 하시겠어요?’라니. 많이 희석된 기억인데 이건 선명하다. 화가 난 나. 살면서 뭘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내가 내 일을 잘 못한다는 말을 듣는 게 짜증 나는 일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아니 내가 잘못 구한 거면 일 끝나고 보낸다는데 왜 저러지? 아직도 그 대외활동 팀원들 일하는 거 뒤로 하고 건물 밖으로 나온 거 기억난다. 멀리 밖으로 나왔다. 화가 난 채로 답장을 했다.
“저기. 진짜 미안한데 이거 텀 좀 있는 거 아닌가? 내가 중요한 일 있어서 내일부터 자료 다시 구하고 주겠다니까. 말 어렵나? 그리고 단톡방에 말할 소재가 아니니까 1대 1로 말하지. 세상 모든 대화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하는 편인가 보네. 적어도 상대방이 말하면 그게 무슨 의도인지부터 파악하면 좋겠음. 본인 말마따나 누구나 다 하는 거 가지고 너무 유난 떠는 거 아닌가 싶네. 난 자료 바꾸라고 강요한 적도 없고 ‘다시 보낸다’고 분명히 존댓말까지 써서 말했음. 네 태도에 화나지만 나름 본인 존중했음. 본인만 화내는 게 다는 아니야. 난 이만하면 된 것 같고 이거 답 해도 확인 안 할 거니까 답장하지 마시길.”
감정을 터트렸다. 그전에 훨씬 더러운 행동을, 글을 썼기 때문에 이런 일이 또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래야만 했다. 감정소모의 여지를 두고 싶지 않았던 나는 마음 한 편에서 꿈틀대는 욕망에 손을 잡았다. 폭언이라는 단어를 지금 당장 포털에 검색하면 ‘난폭하게 말함’이라는 정의가 딸려 나온다. 일반적으로 사회적 맥락에서 폭언이라는 단어는 욕설을 섞은 말로 해석한다. 난 폭언하지 않았다(그리고 어디 가서 폭언을 내뱉고 살진 않는다. 내 주변 사람들은 소중하니까;). 하지만 난폭하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폭언이 아닌 선에서 난폭하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근거가 뭘까. 나는 이 말을 하면서 쾌감을 느꼈다. 내면의 무언가를 붕괴시켜서 타인에게 따져 묻는 말이 즐거웠다. 내가 그동안 누군가에게 뭔가를 드러내는 걸 잘 못하던 타입이어서 그랬던 게 이유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우선순위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 걸 ‘제대로 할 수 있겠냐’라고 공격해서이고, 죄책감을 느끼던 일과 겹쳐 보여 서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내면의 공격성이 발현되고 죄책감을 느끼던 일과 대비된다는 것이 신났다. 뭔데 내 기억을, 경험을 건드리지? 그리고 이런 나를 막기도 싫었다. 남에게 상처 주는 일을 해서 마음이 복잡했음에도 그 반사작용이 나쁘지 않았다. 금세 몇 얼굴이 뒤섞인다. 하지만 당당하다. 오히려. 이렇게 내 걸 건드는 사람을 지키는 일이 즐겁다는 걸 그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지켜야 하는 것, 그러니까 사랑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게 내가 나인 것을 말해주는 거의 유일한 것일 테니까.
그렇게 내 걸 지키면서 오는 쾌감을 지켰던 에피소드는 엔딩에서 완성된다. 그렇게 광기인지 아닌지 모를 무언가를 분출한다. 혼자만 당할 순 없었다. 미안한 얼굴이 보여 흠칫하지만 ‘아무튼 그 일과 이 일은 다르다’라며 정신승리한다. 내가 이기적인 면이 있다고 다시 느낀다. 무슨 일이든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고 심지어 잘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에 집중한다. 이렇게 집중하게 될 거 알았으면 진작에 이럴걸.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이 무조건 능사는 아니다. 한 30분 몰입하고 나니 전화가 온다. 그 후배의 남자친구였다. “야. 우리 봤었지? 내가 무슨 일 때문에 전화했냐면. 내 여자친구가 지금 울고 있거든.” 뭔 소린가 싶었다. “왜?” 솔직히 왜인지 알았지만 그냥 괜히 한 번 물었다. “네가 여자친구한테 말 좀 심하게 했던데. 걔가 지금 울고 있어.” 솔직히 수화기 밖에서 웃었다. 남자친구를 떠나 가족도 안 할 짓을 하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겪은 일에 화가 나서 남자친구가 전화한다? 중학생 애들인가? “너랑 무슨 상관인데?”라고 답한다. 일부러 기분 나쁘라고 하는 답이다. “무슨 상관이긴 무슨 상관이야. 넌 너 소중한 사람들이 이렇게 상처받으면 가만히 있을 거야?” “그럼 가만히 있어야 하지 않나? 아예 상관없는 내가 개입하는 게 성인의 방식인가?” “걔가 얼마나 여린 애인데. 우리 얘기 좀 하자.” 일부러 들으라고 한숨 푹 쉰다. 그 어디에도 경험한 적 없었다. 말이 능수능란하게 나왔다. “그 네 여자친구가 여린 애인지 강한 애인지 알 바 아니고. 네 여자친구 일을 네가 전화하는 거부터가 웃기네. 그 미안한데 너 여자친구한테 무슨 일인지 듣기는 했니?” “어. 네가 말 심했던데.” “내가 뭐가 심했는데. 아니 내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다음날 자료 주겠다는 게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인가?” 그 남자친구란 놈은 말꼬리를 계속 잡았다. 무슨 공주 구하러 온 왕자님인 양 “내가 잘못했으니 네가 자료 새로 구해서 다시 줘라”만 반복했다. 전화를 끊으면 내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뒤엎겠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또 화가 났다. 더 비꼰다. “네 여자친구가 정말 여려서 그렇게 별것도 아닌 것에 화 내고 그런 거구나. 말귀도 잘 못 알아먹고.” ‘그런 거에 화낼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속을 긁는 말을 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짧았다. 그 전화를 받았던 공간은 대외활동 행사가 운영하던 곳이었고 말싸움이 있었으며 이는 곧 팀원들이 피해를 봤다는 말이 된다. 억지로나마 ‘미안’이라는 말을 했다. 가끔 이 생각이 나면 고통스럽다. 팀원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나도 더 뻔뻔하게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내 걸 건드리는 사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이 일이 기억난다. ‘좀 참을까’ 싶다가 ‘그래 그때 다 못 갚아줘서 화났었지’ 싶어 머릿속의 단어들을 예열한다. 내가 하는 일과 세상을 건드리면 다 부수겠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좋아했던 일을 방해했다는 후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미련. 그리고 더 이상 남이 내 선을 넘게 만들지 않겠다는 공격성까지. 이 세 가지는 나에게 있어 부정할 수 없는 이기심이다.
그렇게 난 서서히 변해갔다. 왜 악당이 되었나. 사랑 때문이다. 사랑이 뭔지 몰라 방황하던 나. 내가 글 쓰는 걸 꽤나 좋아하던 사람이라는 자각, 뭔가를 만드는 게 이렇게 재미있다는 내적 성장이 날 악당으로 만들었다. 난 이 것들을 지키기 위해 악당이 됐다. 선을 넘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선 넘지 않은 선에서 공격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마키아밸리적으로 다 걸고넘어지고. 선을 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적을 굳이 만들 필요가 없는 건 인생의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불가항력으로 들이대는 어퍼컷들 위로 넘어서려면 지금 당장의 삶에서 더 올라가기 위해 앞서 나가야 한다. 이래야 내가 좋아하는 걸 지켜서 남자다운 것이고, 세상에게 나를 보여줘 내 가치를 인정받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