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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Oct 15. 2023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희망이 더 무서웠던 두 남자

<화란> 스포일러 없는 리뷰


희망사항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가상의 주인공 명안에 사는 소년 연규다. 어디론가 가는 연규. 손에는 돌 하나가 있다. 도착한 곳에 연규의 여동생 하얀이가 있다. 그리고 하얀이 옆에는 남자 일진 무리들이 있다. 이상한 일에 엮인 하얀. 하얀이가 위기에 몰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연규. 연규는 손에 있던 돌로 일진 무리 중 하나의 뒤통수를 때린다. 하얀이를 위기에서 꺼내는 데에는 성공한 연규. 하지만 감정적인 판단에 따른 뒤처리가 필요했다. 합의금이 필요한 연규. 중국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것으로는 무리가 있었다.


연규는 지옥 같은 일상을 살고 있다. 18살의 어린 나이엔 세상이 더럽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항상 돈이 필요한 연규. 엄마는 새로운 아버지와 재혼했다. 아버지는 무능력한 사람이라 돈을 벌지도 않고 맨날 술만 먹었다. 심지어 새아들인 자신(연규)을 때리기도 했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연규의 일상에 도움이 되는 편은 아니다. 남편의 가정폭력에 무기력한 엄마. 연규의 일상에 즐거운 일이라곤 별로 없는 듯하다. 지옥 같은 하루. 300만 원이라는 돈을 다 갚기엔 솟아날 구멍이 없었다. 그렇게 다 정리하고 화란(네덜란드)으로 떠날 꿈을 꾸고 있을 때, 누군가가 연규를 찾아왔다. “형님이 300만 원 주라 신다. 그리고 나 찾아오지 말래.”



익숙한 것 안에 색다른 맛


영화 <화란>에는 익숙한 향이 첨가되어 있다. 이 영화에 삽입된 몇몇 설정은 기존의 한국 누아르물을 연상시킨다. 우선 첫째로 <똥파리>다. <똥파리>의 주인공 상훈은 아버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이 설정이 영화 안에서 인물과 사건을 가로지르는 토대가 된다. 사랑을 받지 못한 상훈. 상훈은 기본적으로 입에 욕을 달고 산다. 이렇다 할 친구도 몇 없다. 그나마 친하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일수업체 사장은 만식이다. 이 만식에게도, 심지어 유일한 피붙이인 누나에게도 욕설이 입에 딱 달라붙었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서투른 상훈. 그걸 센 척으로 버틴다. 억지로 버티는 상훈의 일상은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몰라 위태롭다. 위태로움은 결국 상훈에게 그대로 돌아와 인물의 발목을 잡는다. <똥파리>의 후반부에 벌어지는 사건 역시 이 상훈의 사회성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니까 이 <똥파리>는 영화의 분위기와 주인공의 내면이 딱 달라붙는 것이다.


<화란>과 <똥파리>는 영화의 분위기에 공통점이 있다. 일단 주인공 연규는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같이 사는 아버지는 가정폭력을 일삼으며 매일 술만 먹는 인간이다. 어머니는 무기력하다. 네 명의 가족을 부양하기에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다. 하지만 명안시의 사람들은 연규를 괴롭힌다. 연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희생해야 할 것들이 몇 있다. 이 ‘희생해야 할 것’의 딜레마가 영화의 분위기와 직결된다. 여러 인물의 상황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이야기의 박력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몇몇 소재도 공통점이 있다. <똥파리>의 연희가 사는 집과 <화란>의 연규/하얀 가족이 사는 집이 비슷하다. 아버지가 무기력한 존재라는 점도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어린 여학생과의 연대도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소재의 공통점은 글쓴이가 보기엔 무의미한 감이 있다. 중반부의 분기점이 지나는 부분에서 두 영화의 이야기 전개는 반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의 분위기가 유사하기 때문에 글쓴이는 영화 중반부까지 ‘이게 <똥파리>랑 어떤 차이점이 있지?’라고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두 영화의 차이점은 중후반부 전개에 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한 이미지가 있다. 이 이미지는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여러 상황을 연결시켜서 반복을 통해 보여주는데, 구체적으로(스포일러가 없는 선에서) 써보자면 인물이 각자의 자유의지로 둔 수는 예상외의 방식으로 각각 캐릭터에게 돌아온다. <똥파리>가 후반부 강렬한 여운을 전달하려고 했단 점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똥파리>가 전해주려고 했던 것이 정서라고 한다면 <화란>은 인간사를 조명한 것이다.



끈적끈적한 피냄새


이 영화는 묘하게 끈적이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 영화가 지옥도를 시각화 한 방식 때문이다. 영화는 공간에다가 특성을 부여해서 인물의 위치를 드러낸다. 우선 연규는 공간적으로 세 군데에 있다. 하나는 엄마, 하얀과 함께 살고 있는 집/연규가 일하는 곳(치건의 사무실, 중국집), 마지막으로 이동 중인 거리다. 연규가 살고 있는 집은 특별하다. 일단 공간이 좁다. 공간이 좁기 때문에 방과 방 사이는 밀착되어 있다. 특히 거실과 부엌이 하나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연규의 방은 이 두 공간에 비해 넓다. 이 두 특성은 영화에서 연규의 입장을 암시하는 듯하다. 연규 혼자서만 끊임없이 겉도는 인물의 내면 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연규의 내면보다 중요한 것은 ‘집 안 동선이 가깝기 때문에 벌어졌던 비극’이다. 이 영화가 밀도 높은 플롯으로 보는 사람의 입술을 마르게 하는 이유는 각본을 잘 썼기 때문이다. 각본이 장소에 부여하는 사실감은 이야기의 밀도를 높여 입술이 턱턱 마르게끔 한다.


영화가 지옥도를 구현한 두 번째 방식은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치건이라는 인물은 영화의 두 번째 지옥을 맡고 있다. 치건이라는 인물은 그 누구보다 든든한 연규의 직장 상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인물의 서사가 공개될 때 안타까운 한숨이 나온다. 이유는 이 치건 서사가 영화에서 사실상 두 번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치건 서사가 전달되는 방식도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비극을 맞는 게 당연하다’는 형태를 따른다. 이는 이 영화 안에서 인물들이 맞이하는 비극이 당연한 운명처럼 느껴지게 하는 장치다. 이미 이 영화의 핵심과 비슷한 사례가 있어 ‘이 인물이 새로운 무언가를 꿈꾼다’는게 잘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정재광 배우가 맡은 승무와 김형서 배우가 맡은 하얀 이는 치건과는 반대로 역할한다. 사실 승무, 하얀의 역할이 러닝타임 내의 물리적 비중만큼 중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승무는 영화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모적으로 쓰이고 있고, 하얀 이는 수동적이다. 둘 다 어느 정도는 기능적인 측면이 있는 셈이다. 정재광, 김형서 배우가 아니면 심심하게 느껴질 이야기에 탄력이 붙은 건 배우 고유의 에너지가 가진 힘이 크다. 이 에너지를 바탕으로 두 인물은 후반부에서 각자 역할을 다한다. 두 인물이 가진 개성이 영화 후반부에 어떤 반향을 일으키는지를 주의 깊게 본다면 역시 흥미롭다.


매력적인 이야기


이 영화가 가진 단점은 인물들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에서 연규가 주체적으로 오롯이 서 있는 장면이 부족하다. 이 이유로 인물이 처해있는 상황이나 절박함은 느껴질지라도 그 이상의 무언가는 다가오지 않는다. 이야기’만’ 재미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등장인물 중 택시기사 아저씨와 관련된 부분이 그렇다. 이 인물과 관련된 연규의 서사는 영화의 핵심을 뒷받침하기 위해 생략된 곳이 많다. 연규가 좀 더 고민하는 장면이 있던가, 아니면 중간에 뭘 더 넣거나 바꿔서 주인공만의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 있었다면 영화의 엔딩에 동의하기 쉬웠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안그래도 강력한 송중기의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 영화의 다른 단점은 기존 누아르물과의 기시감이다. 이 영화에는 고유한 개성이 있다. 바로 사실적인 각본을 통한 끈적끈적한 감정선, 그리고 하나의 딜레마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이는 작품의 충분한 장점이다. 반대로 이 개성을 위해 인물들이 틀에 박힌 것처럼 행동한다. 앞에서도 썼듯 영화에서 하얀이가 깔끔한 동선 하에 움직인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순히 폭력에 물들었다기엔 인물의 태도가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 몇 인물은 기존 한국 느와르물에서 등장했던 캐릭터가 겹쳐보인다. 대표적으로 송중기 배우가 맡은 치건 캐릭터가 그렇다. 이 인물은 사실상의 결말이 다 정해진 것처럼 행동한다. 신선함을 기대하고 들어간 관객이라면 영화가 와닿지는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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