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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동 Dec 16. 2024

기억해라, 너희 둘은 반드시 단 하나다

<서브스턴스> 스포일러 없는 리뷰 


서브스턴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왕년의 스타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이다. 카메라 앞의 엘라지베스. 체조복을 입고 율동 같은 운동을 하고 있다. “Pump it up!”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을 덧붙이는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던 대배우다. 압도적인 연기력과 고혹적인 비주얼로 왕년에 이름을 날렸던 엘리자베스. 지금은 인기가 한 풀 꺾여 작품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어느 날. 엘리자베스의 유일한 일거리였던 에어로빅 쇼 진행자 역할에서 해고당한다. 해고만 당하면 모르겠는데 쇼의 총책임자 하비(데니스 퀘이드)의 험담마저 듣게 된다. “아카데미고 나발이고. 걔(엘리자베스)는 이제 끝났다고.” 심지어 면전에다가도 “50 넘은 여자는 끝났다”라는 막말까지 듣는다. 외로운 엘리자베스. 분명 세상 사람들이 날더러 아름답다고 해줬는데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겉돌던 엘리자베스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난다. 정밀검사를 받는 엘리자베스. 큰 문제는 없었지만 외상보다 그녀 마음에 있는 상처가 엘리자베스에게 더 치명적이다. 그런 그녀를 눈여겨보던 남자 간호사.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 ‘서브스턴스’라는 것을 밀어 넣는다. ‘잘 되길 바랍니다’라는 쪽지와 함께 달려있던 usb. 엘리자베스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 USB에 있는 영상을 재생해 본다. USB에 있는 영상은 허무맹랑했다.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내 안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뭔 소리야? USB를 버리는 엘리자베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선 왕년에 잘 나가던 내 모습이 반복재생되고 있다. 새로운 시작이 필요해. 다시 USB를 주섬주섬 꺼내는 엘리자베스. 서브스턴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육체의 이미지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육체의 이미지다. 육체를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는 영화의 주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와 추, 두 가치는 과연 별개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경계를 구분하는 행위의 타당성을 탐구한다. 예를 들어, 주인공 스파클이 체조를 하는 영상은 단순한 신체적 움직임을 넘어선다. "아름다운 육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시각적으로 던지기 위함이다. 이는 반대편에 서 있는 수 역시 체조 같은 안무를 통해서 스파클과 대비되는 것을 택한다. 이들이 비슷한 의상과 동작을 반복하며 대조를 이루는 과정에서, 카메라는 두 인물의 신체를 클로즈업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둘 중 무엇이 더 아름다운가?*를 판단하게 만든다. 이러한 판단은 영화 후반부와 결말로 이어지며 잊을 없는 기억을 선사한다.


또 이 영화는 시각적으로, 적나라하게 몸을 보여주는 영화기도 하다. 특히 스파클과 수의 관계를 보여주는 특정 공간이 있다. 이 공간에서 두 인물을 카메라가 어떻게 비추는지가 영화의 후반부를 위해 중요하다. 카메라는 어떤 장소를 탐구하듯 인물들을 다룬다. 호기심 가득한 아이를 보여주듯 여기저기 자세하게 찍는다. 이 호기심을 형상화한 카메라 워킹이 두 인물의 처지를 동격으로 만들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수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는 스파클이 사실상 인간으로서 같은 처지에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나체의 인물들을 서서히 쌓아 올린 영화는 엔딩부에서 강력하게 폭발하며 그 모든 에너지를 분출한다. 두 인물이 나타내는 나이 듦과 젊음이 특정 인물의 핵심과도 닮아있다는 점에서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할리우드 


이 영화에서 역시 중요한 것은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 스파클이 할리우드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순간이다. 글쓴이 같은 사람들에겐 인스타그램 릴스로만 볼 수 있는 별로 된 시그니처가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한다. 스파클이 단지 '이런 사람이었어'를 보여주려고만 묘사하는 장면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스파클은 아직도 엔터테이너 산업의 현역으로 뛰고 있고 하비와 함께 일하고 있다. 이 기본적인 설정을 중심으로 영화의 플롯이 정확히 할리우드의 룰 따라 움직인다. 이 장면들이 익숙하기도 하지만 두 인물 간의 처지를 극단적으로 대비시켜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부각하기도 한다. 두 인물의 엇갈린 희비가 '원래 연예계란 그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좋은 것만 보는 연예계'와 '그를 뒷받침하는 할리우드의 룰'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는 설정이기도 하다. 수많은 스캔들이 할리우드를 오고 간다. 그 스캔들을 따라 수많은 팬들이 스타를 공격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를 생각해 볼 필요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면을 보고 스타를 지지하는 걸까? 엔터테이닝 산업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깊은 이해를 방해하는, 그러니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 아닐까? 예쁜 것과 잘생긴 것 말고 나머지를 고민하기 어렵게 만드는 게 할리우드 아닐까? 하는 질문을 영화가 던진다. 


실제로 이 질문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역할이 흥미로웠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면서 미의 기준을 판단하게 만드는 것을 전적으로 관객의 몫으로 돌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에서 시점쇼트가 등장하는 장면이 이야기 상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주제로서나 이야기 전개상으로나 영화 안에서 밑줄 그 여질 때마다 영화 안의 판단을 유발하는 장면에 시점쇼트가 등장한다. 마치 '이 어떤데?'라고 관객에게 묻는 것처럼. 관객을 판단 대상으로 끌고 들어오는 연출은 엘리자베스와 수가 고르는 모든 선택을 인물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와 관련 있다. 엘리자베스와 역시 할리우드 시스템의 일부분으로서 룰을 철저하게 따른다. 선택이 영화에서 폭발하는 연기력, 야자나무로 대표되는 할리우드의 힙한 이미지와 함께 인물들을 안에 가두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엘리자베스와 수가 별개의 인격처럼 느껴진다는 설정은 영화 안에서 공-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둘이 기억을 100% 공유한다고 생각해 본다. 이미 영화와 모순된다. 왜? 영화는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영화니까. 어떤 것을 배격하고자 하는 태도와 이어지지 않는다. 또 이 영화에 존재하는 수많은 객체들과의 연결성과도 맞닿아있는 부분이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 똑 떼고 두 사람만 이어진다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이 수와 엘리자베스로 국한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후반부로 대표되는 한 인물과 그 나머지 사람들은 사실상 동격으로 묘사됐다. 애초부터 별개로 설정했기 때문에 비유가 엄밀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장면에서는 이 할리우드를 비판한다는 아이디어가 좀 얄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약물을 어떻게 만들 수 있나라는 현실적인 문제는 아예 차치하기로 한다. 중요한 건 이 약물의 존재로 인해 나타나는 인물들의 행동이다. 엔딩으로 전력질주하는 영화의 에너지에 후반부의 전개가 보는 데 있어 큰 무리가 아니다. 연출의 통일성으로도 잘 살렸고, 논리적으로 어그러지는 연출도 아니며 감정선을 잘 탔다. 그런데 인물들이 1차원적이다. 특히 수의 내면이 그랬다. 나이가 엘리자베스에 비해 어려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엘리자베스에게 몇 장치를 부여한 것 치고 수는 빈약하다. 또 어떤 장면들은 여성의 성상품화를 목표로 짠 장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폭력을 고발하면서 오히려 인물을 폭력적으로 대한다는 모순을 지적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영화 밖의 세계를 비판하고, 내적으로도 하고 싶은 말을 천천히 쌓아 올린 이미지를 폭발시키는 영화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자기혐오다. 이 영화는 자기혐오의 근원을 질문해 ‘당신은 당신과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나요?’라고 묻는 영화다. 이 영화가 이 질문을 보여주는 방식은 역시 연출력 덕이다. 영화 템포가 초반부부터 폭주해서 사운드와 카메라 숏으로 자극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템포를 늦출 때는 늦춘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어떻게 보면 이질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두 장면이 등장한다. 첫 장면은 초반부에 나온다. 이제 역사의 뒤안길이 된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가 바라는 것은 다시 거대한 명예를 되찾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 그런 줄 알았다. 이 영화의 사실상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 장면이 후반부로 돌아와서 극 중에서 가장 관객들의 마음을 깊게 찌른다. 동시에 이 인물과 장면들은 영화가 배태하고 있는 거대한 질문과도 이어진다. 과연 우리는 아름다움과 추함 사이 어디에  화려하게 쿵쿵쿵거리며 잔인한 장면만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관객 개인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마무리를 담당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감독의 연출도 훌륭했지만 이것을 뒷받침하는 데미 무어와 마가렛 퀄리의 연기가 압도적이었다. 마가렛 퀄리가 수를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아노라>에서의 미키 매디슨이 슬쩍 겹쳐지기도 했다. 왜? 영화 후반부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 사람의 내면을 보여주는 연기가 서서히 등장한다. 납작한 캐릭터의 수를 마가렛 퀄리의 개인기가 살렸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마가렛 퀄리보다 더 강력한 존재감을 펼치는 건 역시 데미 무어다. 데미 무어의 연기는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데미 무어의 모습 그 자체다. 또 조디 포스터 같은 무어의 또래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와는 색달랐다. 특히 혼란스러워하는 연기가 압도적인데, 이 영화가 감정적으로 다가왔던 관객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핵심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 연기를 감독과 폭넓은 논의로 구현한 데미 무어의 역량은 충격적이다. 글쓴이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양자경이 키 호이 콴과 <화양연화>를 오마주 하던 장면이 생각났다(물론 데미 무어의 본작에서의 연기와 양자경의 연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간단한 상황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깔려있는 복잡하고 어두운 내면을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구현했다. 아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름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너희 둘은 반드시 단 하나다


이 영화에 대한 글쓴이의 총평은 ‘나는 과연 어떤가’라는 반문이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사람을 볼 때 외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글쓴이 같은 사람이 비단 나만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나도 마음 한 구석에 인정하는 사실이 있다. 아름답다에는 정의가 없다는 것이다. 100만큼 예쁜 사람. 1000만큼 예쁜 사람. 30만큼 예쁜 사람이라고 수치화를 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장원영 씨가 예쁜 건 장원영처럼 예쁜 거지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내가 이 기준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는 예쁘고 누구는 안 예쁘고 선을 그으며 타자화를 하는 순간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 영화를 보고 문득 들었다. 이 비극을 돈으로 환산시킨 산업이 내가 사랑하고 있는 이 영화 산업의 일부일지도 모르고. 이런 씁쓸한 성찰을 이면에 깔고 하드고어와 코미디 사이에서 내내 광폭하게 질주해 우리 모두가 엘리자베스와 수가 되게끔 만드는 충분한 수작이라고 생각하는 <서브스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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