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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비또바 Sep 07. 2020

존재와 사랑

'피카소, 체 게바라, 마오쩌둥, 박태환'을 넣어 글쓰기

 그러니까 그를 처음 만난 건 <존재와 사랑>이라는 교양수업에서였다. 그 수업은 흥미로운 이름에 걸맞게 데이트 코스를 짜는 것이 중간 과제고, 수업 내에서 커플이 되면 A+을 준다는 소문으로 교내에서 꽤나 유명했다.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었던 나 역시도 그 소문에 혹했다. 마지막 대학생활을 화려하게 마무리하리라. 한 껏 기대에 부푼 마음은 첫 수업에 픽 식어버렸다. '저 사람 만은 아니길'하고 바랐던 그와 짝이 된 것이다.


 이름은 박태환. 그 당시 나이는 스물일곱. 그는 동명이인의 수영선수와는 달리 나와 비슷한 작은 키에 왜소한 어깨를 갖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정교한 2차 함수를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모눈종이 무늬 셔츠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물론, 나는 외모로 상대를 단정 짓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무식이었다. "그건 마오쩌둥이 아니고 모택동 아닌가요?" 중국의 공산주의에 관해 이야기를 하던 중 기습적인 그의 질문을 듣고 말문이 막혔다. 그에게 마오쩌둥과 모택동이 동일인물이라는 걸 말해주자 그는 '아, 그래요? 허허.'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주제가 예술이라고 한들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에게 칸딘스키, 잭슨 폴록, 피카소는 그저 똑같이 이해 못할 그림을 그리는 작자들이었다. 우연히 내 다이어리에 붙여둔 에곤 쉴레의 자화상을 본 그가 그림이 자신과 닮은 것 같다며 비슷한 포즈를 취해 보였다. 그냥 떨떠름이 웃을 수밖에.


 그와 나는 중간고사용 데이트 코스 짜기 과제로 영화 관람 코스를 제출했다. 보통의 프랜차이즈 영화관이 아닌 작은 독립영화관에서 인디 영화를 보고 주변의 골목길을 걸으며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었다. 물론 내 의견이 전적으로 반영된 아이템이었다. 배움을 실천하라는 교수님의 신조로 그와 내가 직접 데이트를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면 화상채팅 데이트 같은 걸 생각했을 텐데. 어쨌든 우리는 종로에 있는 작은 독립영화관에 가서 체 게바라의 여행기를 다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봤다. 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는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관객도 몇 되지 않는 작은 영화관 내에 울려 퍼지는 그의 코 고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참을 졸고 일어난 그와 골목길을 걸을 때, 그는 체 게바라가 누구냐고 물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혁명에 대해 말해봤자 모택동과 마오쩌둥이 다른 인물이라 생각했던 그가 이해할 리 없다고 여겼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어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 불가능한 꿈 하나씩은 가지자'라고 말한."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무척 감동을 받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며칠 후 그는 체 게바라의 얼굴이 흑백으로 프린팅 된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새로 바뀐 그의 프로필 대화명. '불가능한 꿈을 가진 리얼리스트☆'


 그랬던 그와 내가 '우리'가 되어 사귄 지 벌써 2년 째다. 정말이지 어설프고 찌질해 보였던, 내 이상형과 근접하긴 커녕 정 반대에 가까웠던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중국 공산주의의 한계를 논하던 재미없는 나에게 집중해 주었고, 내가 에곤 쉴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했다가 오스트리아 미술전 티켓을 선물했다.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나타난 그는 단 한 마디에도 쉽게 감동받을 만큼 순수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나와 취향이 같은 사람을 운명처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운명보다는 우연에 가까웠다. 나와 너무나 다른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좋아지는 것.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무슨 생각해."

 여전히 '불가능한 꿈을 가진 리얼리스트☆'라고 적힌 그의 프로필 상태 메시지를 보며 추억에 잠겨있던 내게 그가 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사랑스러운 눈빛에 문득 궁금해졌다. 나의 어떤 점이 좋아서 사귀었냐고. 그러자 그가 머쓱한   웃었다. 빈틈없어 보였던 내가 수업 뒤풀이에서  먹고 토하는 모습에 반했단다. 존재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이토록 갑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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