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프로그램을 맡고 약 한 달 반 정도, 또다시 일과 삶의 경계가 흐려진 시간을 보냈다. 이번 프로그램은 다행이다. 매너리즘과 인간에 대한 환멸이 점철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출팀, 작가님들과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가는 것이 꽤나 즐거웠다. 입사 이래로 드물게 느꼈던 작업물에 대한 진심 어린 보람, 딱 세 번째 느끼는 감정이다.
앞선 두 번의 보람과는 다른 점이 분명 있다. 이전의 보람은 퇴사 욕구를 잠재우고 다시 열심히 해보자는 동력이었지만, 이번의 보람은 딱 보람까지만이다. '이렇게 해서 그다음은 뭐?' 허무함은 쉬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동안 내가 많이 닳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한 적도 많고,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걸 만들어야 했을 때도 있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좋아해서 일을 한다'는 순진한 진심보다 '돈을 받고 일을 한다'는 명제가 훨씬 더 견고하다. 그렇게 닳다 보면 이 일에 대한 진심도 조금씩 낡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왜 노동 시간에 있어서는 또 열정이란 가치를 가져와 한 달에 4-500시간을 채우게 하는 걸까. 이런 얘기를 나눌 때 안 그런 회사가 어디 있겠냐고 반문하는 사람들 이 꼭 있는데, 그런 이들 앞에서는 입을 다문다. 아무튼 쉽게 말하면 번아웃일 텐데 도통 채워지지 않는다.
올해 연달아 아이돌 프로그램을 맡게 되면서 계속해서 아이돌 그룹을 만났다. 많아야 20대 중반, 어리게는 10대 중후반. 모두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들의 반짝임이 꼭 젊음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젊음이 그 반짝임을 더 눈부시게 하는 것도 분명 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 반짝거리는 것의 힘은 세다. 오감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시각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던 것 같다. 화려한 퍼포먼스, 다양한 표정과 끼. 보고 그 자리에서 단숨에 반하게 만들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 환호와 사랑을 받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
나와 전혀 다른 삶의 궤도를 그리는 사람들을 보다 보면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것도 아닌데 내 삶이 허름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한 달 반의 결과물을 릴리즈 하던 날. 같은 날에 출연했던 아티스트가 나온 다른 영상 여러 개가 올라갔다. '놀면 뭐하니'도, '네고왕'도 아닌 우리 프로그램은 피드에서 금방 뒷전으로 묻혔다. 그렇게 묻히고 묻히는 무수히 많은 영상 중 하나가 된다. 쏟아지는 콘텐츠 속에서 묻히지 않고 버틴다는 것이 참 어렵다. 그래서 한 친구와 얼마 전 술을 마시며 나눴던 대화가 자꾸만 마음에 떠오른다. '시간을 견디는 걸 만들 고 싶어요'
공을 들이는 것이 낭비처럼 보이고, 어리석게 여겨지고. 그 빈도가 점점 잦아진다. 콘텐츠를 만드는 건 여전히 좋다. 정말 좋다. 하지만 이렇게 회사에서 이 일을 이러한 방식으로 지탱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까 고민한다. 낡아서 더 이상 빛을 낼 수 없는 마음이 된다면 어떡하지. 이미 그렇다면 어떡하지. '과잉의 시대일수록 디테일'이라는 말을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설정해 두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믿고 버티고 있지만, 정말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