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똥별과 은하수가 머무는 곳

by 뚱띵


초계적중분지

내가 살고 있는 적중면은 5만 년 전 운석이 충돌한 초계·적중분지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적중의 밤은 더욱 특별하다. 머나먼 옛날 별똥별 사연을 간직한 이곳은 시원한 바람의 춤사위마다 별들이 빛나고 은하수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늦은 밤 퇴근길 골목어귀를 접어들면 가로등 하나가 나를 반긴다. 무심히 그 가로등을 바라보다가 오늘 하루도 무사히 마쳤음을 감사하면서도 때때로 불현듯 찾아오는 외로움이 가슴 깊숙히 스며든다. 이럴 때마다 지금도 여전할지 궁금한 고향 사천의 바닷가 등대와 방파제가 떠오른다.

철썩이며 들려오는 파도소리. 파도가 부서지는 곳에는 플랑크톤이 연출하는 연둣빛 형광색 춤의 향연이 펼쳐진다. 어디선가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클라이맥스를 지나면서 물러가는 그 빛은 바다 저편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듯하다가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하얀 형광빛 은하수로 바뀌어 하늘 위로 앉았다. 은하수의 노랫소리가 바람과 함께 마음속을 휘저으며 휘리릭 하늘로 올라가면 숨어있던 별들이 하나둘씩 터진다.

낮의 생명들이 포근히 잠든 이 밤에 알퐁스 도데 작품 '별'의 목동이 되어 별자리 사연을 읊는다. "저건 목동자리, 요건 사자자리, 천칭자리" 하며 봄의 별자리를 찾아본다. 밤하늘은 어느새 고향의 모습이 되어 내 어깨를 토닥인다. 이제 이곳의 골목어귀는 고향의 어귀로 바뀌어 타향살이 외로움을 위로해 준다. 새벽을 맞으면서 옅어진 별빛은 집집마다 켜지는 불빛으로 내려앉는다. 별들의 사연은 우리들의 사연이 되고, 별빛은 우리가 된다.

짚어보니 내가 적중면에 정착한지 어느새 8년이 되어간다. 40중반의 늦은 나이에 공직에 들어와 첫 인사발령을 기다리면서 살 곳을 알아봤지만 형편에 맞는 집을 구할 수가 없었다. 살고 있던 진주시에서 출퇴근을 하려면 운전을 해야 했지만 장롱면허인 탓에 엄두가 나지않아 합천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마침 합천군청이 있는 읍과 15분 거리인 적중면에 집이 났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연고 하나없는 이 곳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침이 밝아온다. 지름 200m의 거대한 운석이 쿵하고 부딪혀 형성된 7km의 너른 분지는 처음엔 호수였다고 한다. 이후 물이 빠지고 사람들이 그 비옥한 호수퇴적층에 농사를 지으면서 지금의 아름다운 마을이 생긴 것이다. 마치 보자기 주름같은 산등성이들이 분지를 향해 흘러가고있다. 질서 정연한 논밭으로 황금빛 햇살이 따뜻하게 비춘다. 익숙한 참새소리가 들리고, 마늘 냄새가 코끝을 스치니 '지금이 수확철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의 섭리에 발맞춰 저마다의 자리에서 몫을 다하고 있는 농부의 우직한 성실함에 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하룻밤 묵어가길 거절한 탓에 탁한 물이 나온다는 전설의 미타산 아래 어둠과 함께 잠들었던 새벽안개가 선녀들의 옷자락처럼 하늘거리며 아련하게 올라간다. 마을 제일 큰 정자나무 아래엔 전날 모였던 이웃들이 서로를 반갑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그 옆의 보리는 아궁이 속 고구마처럼 노랗게 잘도 익어간다. 어제는 저 넓은 논에 물을 받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오늘은 그 논물 위로 잊고 있었던 흰색 백로가 앉았다. 먹이를 찾는지 긴 다리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자태가 아름답다. 늘 혼자지만 고고한 녀석은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다.

잠시후 다시 눈길을 돌려 본다. 백로의 우아함이 남아있는 잔잔한 논물위로 간밤의 은하수의 여운과 함께 잘 익은 호박고구마색 보리와 진초록 가로수와 우리 동네 최고봉 미타산이 드리워져있다. 밤에는 찬란히 빛나던 별들이 아침이면 내려오는 곳, 5만 년의 역사를 간직한 이곳의 아침을 감상하고 있으니 문득 벅찬 감정이 솟구친다. '그래, 이 속에 나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비로소 미소가 번지면서 미타산이 품은 탁한 물같은 내 안의 외로움도 서서히 맑아졌다. 이곳의 호수가 고향바다가 되고, 적중의 별이 나에게도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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