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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Jan 21. 2021

맞아 새해에는 때밀이였어

묵은 일을 청산했을 때의 기분이란

"새해에는 때밀이지." 어릴 적, 새해에 목욕탕을 가면 항상 사람이 여탕 속 의자보다 많았다.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새해에는 몸도 마음도 집도 깨끗하게 청소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게 그 붐빔의 이유였다. 때를 밀고 나면 후련하고 마음까지 가벼워진단다. 꼬꼬마 시절의 내가 이해할 턱이 있나. 그저 엄마의 아프고 때로는 간지러운 때밀이 시간이 괴로울 뿐이다. 그때 당시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던 어른들이 말씀하셨던 '후련함과 가벼움'은 그로부터 약 이십 년이 흐른 지금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1

노트북 키보드가 몇 달간 고장 나 있었다. 자판 속 'ㅇ'이 덜렁이더니 쏙 빠졌고 마치 건반 하나가 고장 나 연주하기 불편해진 피아노처럼 문장을 입력하는 것 자체에 불편함을 줬다. 그럼에도 몇 달을 가지 않았는데 코로나로 서비스센터에 사람이 많을까 봐 피하기도 했고 서비스센터 근방에 갈 일이 없어 일부러 가기 귀찮은 것도 있었다. 버티고 버티다 옆에 있는 'ㄹ'자도 덜렁이기 시작해 이제는 진짜 안 되겠어서 약 1년 만에 노트북에게 바깥 구경을 해줬다. 

"키보드를 쓰다 보면 자주 누르는 자판 위주로 먼지가 들어가 들려요."

서비스센터 직원분들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10분 정도 앉아있으니 금세 원상 복구된 노트북 자판을 볼 수 있었다. 


2

구두도 안 신는데 올 겨울이 유독 건조한 것인지 발에 굳은살이 단단하게 생기더니 갈라지고 난리도 아니었다. 집에만 있으니 더 건조해져 그런 것 같았다. 

'크림도 꼬박꼬박 발라주는데 왜 이런담?' 

더 발라줘야 하나 싶어 듬뿍 발랐는데도 발은 혼자 가뭄이 나더니 그 틈새를 따라 살이 갈라져 걸을 때마다 번개 같은 통증이 생겼다. 운동화를 신을 때마다 까진 곳에 물이 닿는 샤워시간 같았다. 그제야 발 관리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방법을 검색하다 어느 유튜버가 강력 추천한 발 각질제거기를 속는 셈 치고 구입했다. 

마치 문 밖에서 내가 주문하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빨리 도착한 발 각질제거기를 받자마자 그날 저녁에 사용했다. 몇 번 쓰자마자 놀랐다. 아니 한 줄기 빛 같은 아이템이....! 이렇게까지 대만족 한 효과 빠른 뷰티 아이템은 처음이다. 단번에 모든 증상을 해결했고 시원하게 굳은살이 갈려나갔다. 더러운데 쾌감 있는 광경. 여드름 짜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이 돌도끼 같은 도구에 중독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비포 애프터 확실한 발 사이에 까진 상처에 마데카솔을 발라주는 것으로 발에 대한 고민이 싹 사라졌다.


3

최근 오랜만에 다녀온 회사에서 팀장님이 대뜸 과제를 내주셨다. 

"금요일까지 부탁해요."

갑작스럽고 그 일을 안 한지 반년도 더 지나서 뭐부터 해야 할지 정리도 안되고 팀장님도 아는 바가 많지 않은 주제에 소개서나 설명서도 없어 뭔지 감도 안 오는 상태로 고개를 끄덕이고 왔다.

'큰 짐이 생겼네.'

내가 하고 싶고 말고를 떠나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 말인즉슨 이건 미뤘다가는 재앙이 된다는 소리다. 묵혀둔 하루 동안에도 벌써 밤잠을 설쳐 새벽에 눈이 자꾸 떠졌다. 바로 다음 날 오전과 낮 시간을 모두 썼다. 반드시 오늘 다 끝내겠다는 불타는 의지로 하얗게 불태웠다. 오늘 밤도 새벽에 깨면 안 되니까.


최근에 겪은 세 가지 일들로 인한 결과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 끝냈을 때의 기분이 말끔하다. 집 곳곳의 물건을 닦고 청소기를 돌리고 바닥 걸레질에 분리수거까지 끝냈을 때의 기분보다 더 군더더기 없다. 마음이라는 공간이 방처럼 네모나게 생겼다면 모서리까지 말끔하게 먼지를 닦아낸 기분이랄까. 

'묵은 때를 모두 청산했다!' 

약 이십 년 전 어른들이 말했던 새해 때밀이의 쾌감을 요즘 자주 경험하고 있다. 이 쾌감은 상황을 안 가리고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한번 이 기분을 깨닫고 몸을 담그면 좀처럼 미루기가 힘들다. 해야만 하는 일이 들어오면 포기하면 포기했지 데드라인까지는 절대 못 미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룰 수는 있는데 끝낼 때까지 마음 한 구석이 무겁고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 시간은 괴롭다. 미루고 쉬더라도 온전히 쉬지를 못하고 잠을 자도 새벽에 계속 깬다. 설거지를 세제만 묻히고 닦지 않은 것 같고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외출한 것 같다. 어른들이 올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목욕탕에서 형형색색 때타월을 손에 끼는 이유도 이 쾌감에 중독된 거라 짐작해본다. 이는 단순히 살에 얹어진 때만 미는 행위는 아니었을 거다. 때와 함께 마음에 안 드는 과거를 버리고 다시 가뿐하게 출발해보겠다는 굳은 마음도 담겨있으리라. 

그래서 해야 하는 일은 최대한 빨리 끝내려 한다. 내가 성격이 급한 이유 하나쯤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나를 부지런하다고 포장해준다.

'내 주변 사람들 중 네가 제일 부지런해.'

'역시 인프제(INFJ).'

'직업군인이나 시킬 것을 그랬다야.'

'FM이 따로 없네.'

남한테 좋은 소리 할 여유 없는 요즘 같은 시기에 감사하지만 부지런해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이제는 그 쾌감을 너무 잘 알기에. '이것도 어른이 되고 있다는 증거 중 하나일까?' 생각하며 오늘도 묵혀둔 일이 없는지 모른 척 눈 감고 있는 일은 없는지 찾아본다. 이번 달은 구석구석 다 때를 밀어버릴 작정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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