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7년 차면 스타트업은 아닌 것 같지만, 내실을 보면 아직 스타트업이 맞는듯하고 무엇보다도 회사에서도 스스로를 스타트업이라고 한다.
이직한 지 딱 한 달이다. 하루는 참 느리게 가는데 일주일은 체감보다 빨리 지나간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냥 시간이 빨리 가 버렸으면 좋겠다가도 출퇴근 외에 하는 게 많지 않은 것 같아 붙잡고 싶다.
호기롭게 스타트업으로 입사했다. 겉으로 보면 지금 회사는 내가 바라던 회사다. 출퇴근 시간이 한 시간으로 이전보다 앞당겨졌고 지하철역과 연결되어있어 눈 비를 맞을 일도 없다. 주변에는 가장 좋아하는 도넛 집이 있고 월급이 위험할 정도로 주변에 맛집이나 쇼핑 스팟도 넘쳐난다. 무엇을 먹고 싶든 다 있고 무엇을 사고 싶어 하든 다 있다. 분위기도 젊고 실제 평균 연령도 이전 직장보다 훨씬 낮은 편이다. 사무실에 노래도 틀어두고 자리에 전화도 없어 전화 공포증을 경험할 일이 없다.
만족스러운 이직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딱 한 달이 된 지금은 잘 모르겠다.
'아니 그렇게 긍정적이었던 네가....'
몇 달만에 만난 친구가 나의 근황을 가만히 듣더니 한 말이다.
퇴근길에 유튜브에서 별다른 영양가는 없는 소소한 영상들을 봤다. 본래 시사나 마케팅 관련 영상을 보며 최대한 유튜브를 보는 시간도 의미 있게 만들려고 하는데, 사무실 모니터 귀퉁이에 뜨는 시계가 PM9:00를 넘기도록 혼자 야근을 하고 불을 끄고 나왔기 때문에 도저히 퇴근길까지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삶의 소소한 행복이자 큰 위로가 된 bts 영상을 보다가 잠시 플레이리스트에서 빠진 'blue&grey'가 영상에서 흘러나왔다. 가사가 나의 일기장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요즘 나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는 듯했다.
실제 퇴근길에 듣다가 캡처한 가사 아무리 직장인이 많은 서울이라지만, 오후 8시가 넘어가면 평일에는 지하철도 버스도 앉아서 갈 확률이 높다. 매일 버스와 지하철 문에 코를 박고 출근하는 나에게는 분명 "아싸 개이득!" 할만한 순간이다. 실제로 야근 첫 주만 해도 보람을 주는 순간이었다. 고생 끝에 빈자리가 온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회사 내부 사정을 알아가면서 야근 삼주 차를 채우니 지하철 빈자리도 딱히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눈이 아플 뿐이다. 조금만 더 높으면 몽골인의 발끝 정도는 따라갈 높은 시력을 갖고 있는데, 회사에 건강을 갖다 바치는 기분이다.
스트레스를 회사에 있는 (최소) 10시간 동안 꾸역꾸역 쌓아두었다가 퇴근하면 또 어찌나 뭐라도 지르고 싶은지 '씨발 비용'이라는 용어는 누가 제일 먼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희대의 네이밍이다. 실제로 퇴근길 버스 안에서 속으로 욕하며 그린티 맛 쿠키를 질렀고 다음 날 후회할 새도 없이 집 앞에 도착했다. 점점 빨라지는 대한민국 배송 시스템은 후회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지금 상황은 동전의 양면이다. 지옥이지만 천국으로 가는 지옥이랄까. 일이 굉장히 많고 다양하게 들어온다. 연결성도 없이 마구마구 들어온다. 전 직장에서의 반년치 일을 삼 주만에 끝냈다. 야근을 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입사 둘째 날부터 지금까지 칼퇴를 한 날이 열흘도 되지 않는다. 야근을 제일 늦게 한 날은 오후 열 시. 집에 오면 그냥 하루 끝이다. 눈 감고 뜨면 바로 '일어나! 이제 출근할 시간이야!'라며 침대 옆 협탁 위에 올려둔 휴대폰 알람이 운다. 열 시까지 야근하고 돌아와 씻고 바로 기절했던 날은 그날도 힘들었지만 다음 날 눈 뜨는데 정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안 그래도 그 전까지도 계속 야근이 누적되고 있었는데 그날 삐용삐용. 멘털이 울기 시작했다. 정신력도 정신력이지만 감정적으로 눈물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야근은 스타트업으로 입사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예상은 하고 입사했다. 그만큼 야근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야근의 '이유'가 싫다. 일을 진행하는 프로세스가 당황스럽다. 모든 일은 팀 리더-파트장의 컨펌을 통해 진행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상이 없다. 다른 회사도 다 그렇다. 문제는 컨펌 시기와 명확성, 업무의 분배에 있다.
뭔가를 컨펌 요청을 하면 퇴근 시간 이후에 피드백이 온다. 속도는 둘째 치더라도 야근하고 있는데 일을 주다니. 야근은 본래 지양해야 하는 것이고 하더라도 직원 개인이 본인의 잔업을 처리하는 집중 시간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다른 일로 부르면 안 되는 것이다. 남아있는 게 안쓰럽지도 않은가. 먼저 퇴근하지를 말던가.
그리고 피드백을 바로 못 준다면 적어도 언제까지 주겠다고 회신이라도 바로 해주면 '언제 주시는 거지?'하고 마냥 기다릴 필요도 없지 않을까. 상사한테 "왜 답 안 주시나요"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어렵사리 받은 피드백도 굉장히 모호하다. 처음에는 내 생각을 먼저 물어보시기에 존중해주는 줄 알고 감사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디자인이든 기획안이든 결국에 내 의견이 반영된 적은 없다. 결국에는 윗분들 생각이 정답이다. 의견을 두 번 세 번 말해도 "그래도 이건 이렇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라는 말로 끝이 난다. 그럴 거면 그냥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의견과 방향을 정해주셨으면 좋겠다. 수정 단계라도 줄여보게. 수정은 어찌나 반복되는지. 수정사항을 최대한 취합해서 한 번에 전달해야 하는데 수정사항을 1차 수정하고 일부 공개하고 2차 수정하고 나머지를 공개하고. 수정사항이 백신도 아니고 순차적으로 계속 나온다. 나는 야근한다고 쳐도 디자이너는 무슨 죄인가. 수정에 수정을 반복하느라 비효율적인 야근을 한다. 디자이너한테 미안한 건 나뿐인가 보다. 수정 한도를 정해놓고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닌 거 싶을 정도로 반복되는 수정사항에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적이 없다. 고객과 약속한 기한이 없으면 마무리가 지어지지 않는다. 알고 보니 입사 전에도 이런 식으로 일이 지지부진했던 적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스타트업의 단점이 시스템의 부재라고 이전에도 많이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도 몰랐고 이렇게 심적 스트레스를 줄지도 몰랐다.
일의 양도 문제다. 팀원이 퇴사하게 되면서 팀원이 혼자가 됐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데 안 그래도 야근하는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매일 드는데 막상 키보드에 손을 얹으면 뭐라 써야 할지 모르겠다. 떠오르는 게 없다.
회사에서 마케터로 근무하고 있어 이벤트를 기획하는 일이 많은데 몇 시간을 모니터를 바라보고 타사의 이벤트 사례들을 찾아봐도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 출퇴근만 했나.'
이번 달 들어 생동감 있는 인풋이 없었다. 아침 출근 준비에 보고 듣는 인문학 혹은 경제 영상, 출근길에 보는 뉴스레터들, 퇴근길에 듣는 좋아하는 가수들의 노래 이게 전부다. 경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나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달이다. 인풋이 단조로우니 아웃풋도 단조로울 수밖에.
그래서 야근하는 와중에도 어떻게 하면 새로운 취미를 만들어낼까 고민하고 있다. 요가, 원데이 클래스 등 떠오르는 것들이 몇 개 있다. 어떻게 시간을 마련하냐가 관건이다.
그럼에도 동전의 양면이라고 하는 이유는 배움에 있다. 전 직장에서는 좁은 직무 안에서 거의 반복하다시피 일을 해야 했는데, 여기는 바다처럼 넓다. 정말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다. 끝이 안 보이는 넓은 바다, 인수인계해주는 사람도 없어 도움받기도 어려운.
콘텐츠 퍼포먼스 브랜딩 가리지 않고 전부 배우고 있다. 광고도 집행하고 채널도 운영하고 이벤트도 기획해서 운영하고 브랜딩 관련 카피라이팅도 담당한다. 과장이 아니라 전 직장에서 하루치 업무량은 이곳의 두 시간만의 양이다. 구르면서 모두 내 것으로 만들고 있다.
24시간 속에 단 1분이라도 숨 쉴틈을 주고자 잠시 들어간 블로그 피드에서 본 어느 이웃의 글이 인상적이다. 원 문은 어느 웹툰인 듯하다.
'원하지 않았던 삶이어도 사랑하려는 노력을 해보자'
이 문장을 읽은 뒤로 회사생활을 사랑해보려고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지옥이 지나면 반드시 나는 더 실력 있는 마케터가 되어 있을 거야.' 하며.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생각도 든다.
'크게 되거나 크게 앓아눕거나 둘 중 하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