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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Aug 19. 2021

여행은 '별로였던' 일들이 가장 소중해지는 것이다

여행의 진짜 묘미

계획파 아니랄까 봐 여행 갈 때도 출발 십사일 전부터 부산스럽다.

'첫째 날 오전에는 여기 여기를 가고, 점심은 여기서 먹고...'

'서로 몇 분 거리이니까 여기는 묶어서 다녀오면 되겠네!'

'여기는 이 음식 맛집이구나! 적어놔야지.'

여행 전 일정을 시물레이션하고 나면 비로소 모든 여행 준비가 끝난다. 이미 여행의 추억이 쌓인 기분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계획한 모든 것을 먹고 보고 와도 정작 가장 자주 생각나는 것은 계획표 밖의 일이다. 

특히 예상치 못한 상황은 당시에는 당황스럽거나 불행하게 느껴지지만, 다녀오면 가장 많이 다시 떠올리는 일이 된다. 이와 관련해서 딱 두 가지 매년 떠올리는 두 에피소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피자 한 조각을 셋이서 나눠 먹었다고?

무려 가족여행에서 말이다. 동생과 엄마와 함께 한 2013년 홍콩 여행에서 일어난 일이다. 모두가 해외여행 초심자였기에 자유일정이 하루 끼여있는 패키지로 홍콩을 다녀왔다. 난생처음으로 해외에서 자유여행을 하는 순간이었다. 홍콩의 번쩍거림이 가득한 도시를 구글맵과 종이 지도에 의존하며 구경하다 우연히 줄기차게 빅 사이즈 피자를 만들어내는 가게를 보게 됐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키친에서는 양탄자만 한 피자를 굽고 있었다. 심지어 치즈 두께가 장난 아니었다. 피자 위에 치즈가 '쌓여있다'라고 해야 맞는 말인 것 같았으니까. 육성으로 "우와-"가 절로 나오는 피자였다. 동생과 빨간 소스가 가득한 피자에서 시선을 못 떼자 엄마는 "우리 저거 먹을까?" 운을 뗐다. 당연히 예쓰!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엄마는 여기 앉아있어요"하고 동생과 조각당 가격을 알아봤다. 정확히 얼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남아있는 현금으로는 한 조각밖에 살 수 없었다. 첫 자유여행이라 환전을 넉넉히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남은 돈을 다시 한화로 바꾸면 손해라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너무 딱 맞춰 환전한 것이다. 

"엄마 저희 그 돈으로는 한 조각밖에 못 사 먹어요"

셋이서 테이블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세 조각 아니 두 조각이라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엄마는 신용카드가 하나 있다며 카드를 꺼냈다.

"그런데 해외 결제가 되나?"

여기서 이때의 우리 가족이 얼마나 해외여행 초심자였는지 드러난다. 그냥 VISA 혹은 MASTER-가 적혀있는지 보면 될 것을 한 번도 해외에서 써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안 된다고 결론 내렸다. 진짜 한 조각밖에 못 먹는 거다. 

결국 한 조각만 주문해서 셋이서 먹었다. 엄마는 두 딸을 생각해서 시식만 했으니 둘이서 나눠 먹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철없게도 그 피자는 미슐랭급 천상계 치즈 피자맛이었다. 토마토소스와 뜨끈뜨끈한 치즈가 두툼하게 얹어진 그 피자는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가족여행씩이나 와서 돈이 없어 피자를 한 조각밖에 못 사 먹다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다. 심지어 그 카드는 해외 결제가 되는 카드였다. VISA라고 쓰인 카드였으니까.

이 에피소드는 매년 명절처럼 챙기는 에피소드다. 이제는 질릴 법도 한데 지금도 이 에피소드를 꺼내면 셋 다 빵 터진다. 우리는 이 에피소드를 '홍콩 거지'라고 칭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부자였는데 홍콩에서만 거지라며 푸하하 구른다. 계획표 속 다른 일정? 매년 얘기하는 건 없다. 오직 이 홍콩 거지가 된 순간만을 이야기한다.


네? 분명 결제했는데요?

2017년 동생과는 처음 떠나는 유럽여행으로 스페인을 선택했다. 일 년 전부터 항공권을 예매했을 만큼 벼르고 또 벼르다가 떠난 귀한 여행이었다. 그만큼 준비는 탄탄했다. 소매치기에게 절대 어느 것도 뺏기지 않으려고 가방에 스프링 줄을 서너 개 달았고 그 줄에 여권 지갑 등 귀중품을 묶었다. 준비물도 한 달 전부터 미리 체크리스트를 만들었고 일정 계획은 한 달이 뭔가. 두 달 전부터 준비했다. 특히 동생과 둘이 떠나는 여행이라 언니로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더 열심히 공부했다. 숙소도 고심 끝에 각 도시별로 결제해 두었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실제 여행의 중반까지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문제는 마지막 도시였던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날에 터졌다.

"체크인 플리즈"

여권을 내밀며 체크인을 부탁드렸는데 스태프가 조회를 하더니 뭐라 뭐라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동생이 듣고는 

"숙박비를 내야 한다는데? 언니 결제하지 않았어?"

"으잉? 무슨 소리야. 예약할 때 다 결제했는데."

당황스럽지만 금방 해결될 것이라는 마음으로 주어 동사 순서도 없는 영어 아닌 영어에 바디랭귀지를 섞어 이미 결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회해도 결제가 안 됐다는 답만 돌아왔다. 멘붕이 시작됐다.

동생은 사기 치는 것일 수도 있다며 잘 생각해 보라 했지만, 생각할수록 기억이 안 났다. 결제를 진짜 안 했나. 안 했나 봐. 안 했다잖아. 

한참 뒤에도 딱히 수가 없어 동생은 일단 체크인을 해야 하니 돈을 내겠다고 했다. 갖고 있는 거의 모든 현금을 다 지불하며 체크인을 했다. 

짐을 객실에 풀며 회계 담당인 동생은 잘 생각해 보자고 했다. 이메일이랑 결제 문자 등을 다 뒤져 봤다. 결론은 내가 결제를 안 하고 예약만 한 것으로 끝. 으휴으휴 동생의 한 소리를 들으며 숙소 ATM기로 향했다. 소매치기가 워낙 많은 도시라 동생이 뒤에서 망을 보고 빠르게 인출을 했다. 인출을 하고 한 햄버거 가게에서 식사를 하면서까지 혼이 나서야 멘붕의 숙박비 미결제 사건은 끝이 났다. 물론 든든한 언니 코스프레도 끝났다. 귀에서 피가 나는 언니만 남았을 뿐이다.

이 순간에는 시무룩해지고 억울했는데 다녀오면 모든 것이 미화되는 것이 여행이라고 바르셀로나 생각만 하면 이 생각이 자동으로 나는데 매번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어휴어휴 역시 덜렁이 어디 안 가 이러면서. 특히 해외를 못 간 작년부터는 그 상황마저 부럽다. 또 당황스러운 일이 생겨도 떠날 수만 있다면 대환영이다.

아, 동생한테는 이 에피소드를 꺼내면 안 된다. 지난번에 한번 "야야 우리 그랬잖아~!" 하며 꺼냈다가 또 타박을 들었다. 몇 년 지난 일로 귀에서 또 피가 날 뻔했다.



공교롭게도 둘 다 여행 경비와 관련된 일이다. 경비에 크게 차질이 생기면 여행이 틀어질 수 있기 때문에 사실 가장 문제가 생기면 안 되는 일 중 하나이지만, 이 순간들이 없었으면 그 여행에 대해 매년 다시 떠올리는 일이 있을까 싶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변수는 빈틈을 노리고 툭 튀어나온다. 당연히 계획파 여행자에게는 썩 반가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 변수가 밉지 않은 이유는 당시에는 별로인 계획 밖 일들이 시간을 타고 점차 소중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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