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뚜벅이는 윤슬 Sep 11. 2021

생각보다 괜찮은데?

이 기분을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 오자마자 노트북을 켰다.

검토하고 또 검토한 글은 분명 각이 잡히고 정갈하지만, 다음 날 일어나서 이불을 어 차도 오늘 산책하면서 본 분홍빛 뭉게구름 같은 두둥실-한 감정 그대로 남기려면 최대한 날 것으로 남겨야 할 것 같아 검토는 하지 않기도 한다.



'생각보다도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놀이공원의 자이로드롭을 탈 때 맨 위에 올라가면 항상 "어떡해 어떡해 괜히 탔나!" 있는 호들갑은 다 떨어놓고는 막상 우우우웅- 거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나면 "완전 재미있어! 또 타자!" 신남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말할 때.

부담감과 일적으로 가는 해외는 별로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발리 그리고 중국 상해라는 인생 여행지를 얻어 왔을 때.

'괜히 더 올라가기 싫은데 억지로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야' 걱정했지만 취미가 하나 생겼음을 확신했던 첫 등산 모임.

지금 카메라로는 좋은 반응을 얻기에는 글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올리고 나니 두고두고 좋은 여행의 추억을 상기시켜 주어 감사하다는 댓글이 달리는 유튜브 속 영상들.

오늘 내 상태가 그랬던 것 같다. 생각보다 나 괜찮은데?


요즘 무기력증이 제대로 왔다고 생각했다.

지금 회사에서 당한 여러 일들로 낮아진 자존감.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나한테 맞는 일일까- 갑작스레 찾아온 커리어에 대한 불확신.

아주 문득문득 불안하게 만드는 건강상태.

하루를 잡아먹는 체중에 대한 강박.

생각해 온 서른 살과 당장 코 앞에 직면한 현실 속 서른 살의 간격.

작은 덩어리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똘똘 뭉쳐 하루를 일주일을 뭉개었다.

퇴사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떨어진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것은 그리 단순하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건강도 마찬가지였다. 건강은 예방만이 답이다. 떨어지는 순간 끌어올리는 것은 수십 배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커리어는 유튜브의 각종 조언대로 나의 가치관과 성향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들을 다 꺼내어 새로 조립해봐도 명확하게 결론이 서지 않았다.

체중에 대한 강박은 안 그래도 무기력한 일상을 더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식단에 집착하느라 배고픔을 견디느라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렇게 하냐며 서러우면서도 먹방을 보며 견디고 배고프다고 졸리지도 않으면서 일찍 잠에 들고 맛집을 차단하려 동네를 벗어나지 않았다.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SNS고 유튜브고 무기력증이 찾아온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얻고 싶었지만 실상은 간사한 인간인지라 남의 고통보다는 내 고통이 커 보였다.

살고 있는 일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개선도 못 하고 기력은 점점 땅굴을 팠다. 아무래도 최소한 삼 분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나을 것이라는 기대는 그만두었다. 그냥 그런대로 살아야지 뭐. 그런 와중에 오늘이 온 거다.


결과적으로 생각보다 괜찮더라. 하루도 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습관처럼 공복에 쟨 체중계의 숫자가 마음에 들었고, 깍둑썰기를 시전 한 사과와 하루견과 한 봉지를 뜯어 넣은 플레인 요거트는 오랜만에 먹어서인지 생각보다 훨씬 맛있었다.

TV 속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가 전해 주는 여행에 대한 갈증은 목마름보다는 2차 백신을 맞은 뒤인 미래에 대한 기대에 가까웠다.

12시가 조금 넘어온 친구들은 함께한 지 십 년이 훨씬 넘은지라 몇 달만에 봤지만 드문드문 보는 사이처럼 어색하지 않았고 짤막한 근황 토크만으로도 충분히 까르르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항상 근거나 대가 없이 응원해주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주제도 산발적이고 소소했지만 갖고 있던 걱정을 떠올리지 않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이렇게 내 편이 되어주고 기꺼이 시간과 돈과 감정과 발걸음을 쓰는 친구들을 곁에 두고 못나게 굴고 허송세월 보내면 진짜 배신이지.'

이런 자극을 주는 친구들에게 언제나 감사함을 표현할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며칠 전 읽은 책에서 남을 배려하려면 나부터 바르게 서야 한다는 글을 봤다. 그것이 최소한의 경제력이든 자존감이든. 그런 것들을 가지고 싶다는 욕심이 산책을 하면서 뭉게구름처럼 떠올랐다.

치팅데이라고 생각하고 아몰랑- 먹어버린 음식은 몇 주간 먹고 싶어도 참아왔기에 당연한 것이겠지만 오롯이 그 맛과 시간에 집중하게 했다. 먹고 싶었던 로제 닭발, 뿌링클과 곁을 항상 따라다니는 치즈볼, 친구들이 먹고 싶어 한 엽기떡볶이는 양도 딱 맞았고 이야기의 안줏거리로도 적절했다. 몇 주만에 배가 부른 기분을 느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고 싶을 정도로 좋은 기분이다. 친구들이 집을 비워 주고 터지기 직전의 풍선 같은 배를 땅땅- 수박 고를 때처럼 두들기고는 마스크를 쓰고 공원을 두 바퀴 크게 돌았다. 비록 하루 만에 0.7킬로나 쪘지만 덕분에 공원을 두 바퀴 돌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고 행동했으니. 이만하면 선방했다.

마음이 긍정적으로 작동하면 무기력함을 대하는 자세도 능동적으로 변한다.

무기력함이 찾아오기 전까지 돈보다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생각해 왔던 경험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제 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뭔가에 도전하고 싶은데? 생각보다 괜찮은 상태인 것 같은데?

삼 분기까지는 글렀다고 생각했던 무기력한 일상을 생각보다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내일부터 다시 무기력함이 쌓일지도 모른다. 불행은 하하호호 웃을 때 등 뒤로 다가와 칼로 찌른다는 장항준 감독의 말처럼. 그래도 오늘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산책 중 만난 분홍빛 뭉게구름처럼. 생각보다 괜찮은 하루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유랑 동갑이라 참 다행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