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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Sep 19. 2021

물건에 삶을 기대는 편입니다

이번 생에 미니멀 라이프는 글렀습니다

최근 집을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하면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네 명이 사는 집 안에서 가장 많은 물건을 가진 사람이 나라는 점이다. 각자 방의 물건을 박스에 담았는데 싱글 침대를 두 개 놓으면 가득 차는 그 작은방에서 박스가 열네 박스가 나왔다. 용달차 아저씨는 무슨 짐이 이렇게 많냐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이것도 짐 뺀다고 많이 버리고 판 결과물인걸요?

외출할 때도 보부상은 여전하다. 잠깐 약속 나가는 건데 어디 여행이라도 가려는 건지 묵직해서 어깨가 아플 지경이다. 엄마는 항상 내 가방을 들 때면 "어구구"라며 깜짝 놀란다. 그래도 나름 짐 뺀다고 뺀 건데?

때문에 여성스러운 작은 핸드백에는 욕심도 없고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무조건 에코백 아니면 백팩. 핸드백도 책과 카메라가 들어갈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토록 줄인다고 줄여도 일상에 잡다한 물건이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평소 물건에 일상을 의지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등에 땀방울이 굴러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긴장한 순간을, 새로운 시작에 설레는 기분을, 불안하지만 편안해지고 싶은 노력을 물건에 기댄다. 그 기댐의 역사는 어린이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엄마는 아직도 말한다. 내가 애착 인형에 지대한 집착을 부렸다고. 할머니 댁에서 인형을 챙기지 않고 집에 와 잠도 안 자고 울어대던 나 때문에 아빠는 다시 한 시간반 거리의 할머니 댁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은 인형 목에 스트랩을 달아 손잡이를 만들어 주셨고 나는 잘 때도 그 스트랩에 엄지 손가락을 넣고 잤다. 그 인형은 서른 살을 앞둔 지금도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다.

중고등학생 때는 인형 대신 다른 물건에 기댔다. 중학생 시절에는 낯가림이 심해 반이 바뀔 때마다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성격을 극복하고 싶었는지 대안을 고민했는데 그 결과가 친구들이 필요로 할만한 것들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딱풀, 가위, 스카치테이프, 두루마리 휴지 같은 것들이다. 두루마리 휴지는 사물함 속에, 딱풀 가위 스카치테이프는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친구들이 "혹시 휴지 있어?"라고 물어보면 나지막이 "있어"하며 사물함에서 두루마리 휴지를 꺼내 주었다. 그 노력은 수능을 칠 때까지 계속되었고 덕분인지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무사히 졸업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도 여전하다. 회사 사무실에서도 항상 스템플러와 개인 USB, 30cm 자, 칼, 스카치테이프를 구비해 둔다. 모두 자비로 구입했던 것들이다. 회사에 사달라고 하면 준다지만 어쩐지 성격상 내 돈을 주고 사야 마음 편안하게 내 자리에 두고 쓸 수 있을 것 같아 기꺼이 지갑을 연다.

단지 이 노력의 목적이 학창 시절과는 다르다. 사무실 책상 위를 문구점처럼 만드는 이유는 최대한 당황하거나 스트레스받는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함이다. 공적 공간인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개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곳은 책상뿐이다. 그 책상 안에서만큼은 최대한 변수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사무용품을 들여놓는다. 누군가에게 드릴 서류를 보기 좋게 집어야 하는데 클립이 없으면 작은 변수가 되고 이런 일이 누적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른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에는 성격상 좀 민망하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조심스러워하는 성격이라 애초에 그럴 일을 최대한 만들지 않으려고 책상 서랍과 위를 문구점으로 만든다. 똑 부러지게 일하고 싶은 희망사항을 물건에 기대며 산다.

사무실이 그런데 방이 오죽할까. 리모델링하면서 원하는 대로 방의 모든 것을 직접 골랐다. 커튼, 옷장, 침대, 침구류, 책상과 협탁은 모두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굵직굵직한 물건 안과 위에는 작은 물건들이 놓인다. 각종 펜 포스트잇 크기가 제각각인 노트들 스티커 피규어 전자제품 등 리모델링 전에 '이제 최대한 미니멀하게 살아야지' 다짐했던 순간은 잊은 것인지 많은 물건들이 방을 채운다. 이번 생에 미니멀 라이프는 불가능할 것 같다. 그래도 방이 마음에 드는 것이 맥시멈에 가까운 방에는 오롯이 취향과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방 어느 공간에 앉고 누워도 불편함과 아쉬움이 없다. 책상에서는 부지런하게 미래를 개척하고 싶은 열정을 온갖 펜과 노트 다이어리 가계부에 기대고, 낯선 여행지에서도 당당하게 여행하고 싶은 모험심은 수납 침대 밑 서랍 속 여행용품들에 기댄다. 끈기 있게 취미로 가져가고 싶은 등산에 대한 욕심은 옷장 속 등산 장갑과 등산복 그리고 힙색에 맡긴다. 이보다 든든한 방이 없다.


외강내유 성격에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 겁쟁이라 생명이 있든 없든 곁에서 나를 돕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에 유독 감동받는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은 가끔 무섭기까지 하니까. 등 뒤로 살금살금 와서 칼을 꽂는 것 같달까. 그때 주변에 있는 작고 큰 물건들이 말해준다.

'걱정하지 마! 혼자가 아니야! 우리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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