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발을 담근 울산에 대한 기록
울산을 여행하는 동안 머릿속을 빙빙 돌았던 여러 문장들을 요약하면 딱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왜 이제야 온 거지?'
어느 장소를 가도 이제야 온 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 정도로 예상과 기대를 모두 뛰어넘는 곳이 울산이다.
이상하게 울산과는 인연이 잘 닿지 않았다. 대표적인 국내 여행지 중 한 곳임이 분명한데도 경주 부산과 같은 근방의 지역만 재방문 재재방문...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십 대 마지막 구월, 구월의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울산'이라는 곳에 발자국을 찍었다.
비록 일박 이일의 짧은 여행이었지만 빵가루가 촘촘하게 뭉쳐져 묵직해진 파운드케이크 마냥 알찬 시간이었다. 다녀온 뒤로 잠시 휴식기를 가졌던 여행에 대한 추진력이 다시 '부릉부릉-' 엔진 소리를 냈으니까.
이 글은 그 이유에 대한 기록이다.
등산 옆에 트레킹
운동은 억지로 하는 여러 행위 중 하나에 불과하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땀을 흘린 뒤의 뿌듯함과 집중하는 순간이 너무 좋다는데 아직 그런 기분은 느껴본 적이 없다. 운동할 때 드는 생각은 딱 하나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야'
대체로 투덜대면서도 건강 때문에 억지로 하는데,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등산'이다.
등산은 뭐랄까. 운동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 일종의 여행 같다. 매번 새로운 풍경을 발견하고 걷는 것 외에 딱히 요구되는 능력이 없으며(밧줄 잡는 산을 갈 정도로 실력 있는 등산인이 아니기에) 하산 후에는 '다녀왔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이 여행과 닮았다. 이는 '운동은 싫어하는데 등산은 좋아해요'라고 말하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울산 대왕암공원의 해안길을 걸으면서 등산 옆에 '트레킹'도 넣고 싶어졌다. 대왕암공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출렁다리가 메인이라고 생각했다. 국내 최장 길이의 출렁다리라고 하고 개장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남들보다 빨리 가 보는 으쓱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 여행은 직접 가 보기 전까지는 함부로 예상하지 말라했던가.
다녀온 뒤로는 출렁다리보다 슬도까지 걸어간 해안길이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 날씨가 맑은 만큼 햇빛이 등에 땀을 내는 직사광선 같은 날씨였어도 걷는 내내 즐거웠다. 해안 절벽을 따라 한 시간 ~ 한 시간 반 가량을 걷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뀌는 바다 위 풍경에 질릴 틈이 없었다. 거대한 선박이 줄지어 수평선 위를 채운 광경이 신기했고, 알록달록 파라솔이 꽂혀있는 의도치 않은 색감 깡패를 만나기도 했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바위들의 모양에 감탄하기도 했다. 계단이었다가 울퉁불퉁한 등산로였다가 지압돌 같은 몽돌 해안가였다가 잘 정비된 평탄한 길이 되기도 했던 다채로운 길의 모양도 재미를 더했다. 걸으면서 '트레킹 여행을 떠나봐야 하나' 새로운 취향을 발견했다.
'나는 걷는 운동을 좋아하는 걸까?'
'어쩌면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도 걷기가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몰라.'
순례자길 올레길 걷기 같은 것은 전혀 내 인생에 들어올 여지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울산을 다녀와서는 그 단단한 성벽에 문을 냈다.
오션뷰와 양대산맥, 공장뷰
울산만의 매력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공장뷰'라고 바로 답할 것 같다.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한 곳이기도 하지만, 몇십 년 전까지의 시간을 모두 포함한다면 공장 굴뚝이 많은 산업도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지금도 현대중공업 자동차 등으로 무엇을 상상하든 그 보다 훨씬 크고 넓은 스케일의 공장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덕분에 여행하는 내내 일명 '공장뷰'를 실컷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난생처음 본 역대급 공장 스케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멋있다는 생각보다는 마치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 연기를 연신 뿜어내는 하울의 성을 보는 것 같았다. 거대한 선박과 빼곡한 굴뚝들, 줄지어있는 새 자동차들을 보며 '울산은 한국을 움직이는 굴뚝인 걸까?' 생각했다.
원래 진짜 봐야 하는 것들은 항상 뒤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 법칙이라도 되는 걸까. 스케일에 익숙해지고 나서야 크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도시를 채우는 공장이 만들어내는 풍경의 특별함이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 빨간색 알록달록 옷을 입은 굴뚝과 어디에 쓰이는 것인지 뭐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는 회색빛 공장 설비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또 하나의 다른 세상 같았다. 도시가 다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만 같고 밤이고 낮이고 불이 꺼지지 않는다고 하니 견고한 성벽을 쌓고 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분명 이질적인데 항구를 채우는 알록달록한 선박들과는 또 잘 어울리니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다. 국내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공장은 여럿 봤지만 이렇게 차별화된 뷰는 처음 봤다.
이처럼 울산의 공장뷰는 단순히 공장을 보는 것이 아닌, 열려있는 또 다른 세상을 발견한 것 같다. 그리고 그 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울산을 가는 것이다.
꼭 간절곶에 가지 않아도 괜찮은
울산에서 일출을 본다고하면 누구나 간절곶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한국 전체를 통틀어서도 대단히 유명한 일출 명소이기에 당연한 연결고리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간절곶은 시간 관계상, 또 효율적인 여행 코스를 위해 간절곶은 제외되었다. 간절곶이 제외되면서 당연히 일출은 생각하지 않았다.
'일출 올해 많이 봤는데 뭐 꼭 안 봐도 괜찮지.' 아쉬울 것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만약 울산에서 일출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상태에서 일출을 못 보게 됐다면 아쉬운 것 이상으로 '맙소사'하며 최소한 이마는 짚었을 것이다.
일출은 간절곶보다 더 따뜻하고 프라이빗한 호텔 객실에서 봤다. 호텔 조식을 여유롭게 찍고 먹기 위해 알람을 일출 시간보다 삼십 분 더 일찍 맞추고 잔 덕분에 볼 수 있었다.
비록 구름이 수평선 바로 위를 띠처럼 두르고 있어 선명하게 보지 못했지만, 풍경이 주는 기쁨만큼은 제대로 본 일출과 동일했다. 게다가 난생처음 온 울산에서 보는 일출이기까지 했으니!
주황빛과 분홍빛 사이 묘한 색감을 내는 일출의 색감은 몽돌 해변이라 바다가 들어올 때마다 도르륵-도르륵- 맑은 소리를 냈는데 일출 BGM으로 찰떡이었다. 영상으로 찍어서 집에서 몽돌 해변 소리 듣고 싶을 때마다 들을 것을 그랬나?
울산광역시의 규모가 넓은만큼 간절곶이 여행 일정에 못 들어갈 수도 있는데 간절곶은 포기할지언정 일출을 포기하지 말자. 바다가 있는 곳이라면 태양이 알려주는 하루의 시작을 충분히 볼 수 있다.
울산여행의 여운이 길다. 울산에 다녀온 것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았는지 SNS 피드에는 왜 그렇게 울산 사진들이 많이 뜨는지 아는 척을 하다가도 가보지 못한 여행지를 보면 '한 번만 더 다녀올까' 고민하게 한다.
특히 지금 시즌이 억새가 한창이라 영남 알프스라 칭하는 '간월재'가 그렇게 가고 싶어 졌다. 실제로 당일 투어를 결제했다가 모객이 안 돼서 실패했다. 입이 삐죽 나온 채로 구월 마지막 날 다녀온 울산여행을 아직도 깔끔하게 매듭짓지 못하고 있다. 울산이 이렇게 다채로운 곳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다녀올걸. 아직 한참 먼 여행자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