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옹골찬 까눌레의 매력이란
디저트에 대한 선호 기준이 딱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식감이 명확한 것들을 사랑한다. 부드럽거나 녹아내리는 것보다는 확실하게 씹히는 식감을 선호해 대체로 바삭한 디저트를 좋아하는데 그 끝판왕이 까눌레라고 생각한다. 겉이 바삭 보다는 '빠삭'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정도로 포크와 나이프에 힘을 주어 잘라야 한다.
두 번째는 술로 발효하는 맛을 좋아한다. 트럭에서 파는 옥수수 술빵과 기지떡 그리고 제주도 전통 빵인 상웨빵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에 해당된다. 술빵 특유의 맛이 있다. 알코올이 날아가고 구멍이 송송 뚫리며 부풀어 오를 때 생기는 구수와 고소함의 사이랄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맛이지만 분명 일반적인 빵에서는 나지 않는 그 알 수 없는 맛을 좋아한다. 이런 맛은 한국식 디저트에서만 난다고 생각했는데 까눌레에서도 그 맛이 나 그렇게 가보지도 못한 프랑스 디저트에 빠지게 됐다.
*까눌레란? : 풀네임은 까눌레 드 보르도. 우유, 계란, 밀가루, 바닐라, 럼, 버터, 설탕 등을 섞은 반죽을 구운 과자.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먹던 과자이다. 겉은 검게 그을여져 있고 속은 촉촉하고 부드럽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여행 중에도 까눌레 사랑은 계속된다. 몇 년간 SNS와 아티클 등을 통해 빅데이터를 쌓고 분석한 결과, 제주도에 까눌레 양대산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번 제주도 여행 때 두 곳을 모두 정복하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한 곳은 동쪽 한 곳은 서쪽에 있어 '양대산맥'이라는 타이틀이 잘 어울린다.
결정적으로 이번 여행의 숙소였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여행자와 스텝이 모두 두 곳이 까눌레 양대산맥이라 말하면서 이번 까눌레 정복기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그 결과를 시작하면 아래와 같다.
동쪽 - 모뉴에트
첫 번째 까눌레 맛집은 제주도 동쪽, 구좌읍 종달리에 위치한 '모뉴에트'다. 음악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만든 음악 카페 컨셉의 카페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들려오는 클래식과 카페 벽을 모두 채운 각종 스피커와 악기, LP 등을 통해 아버님께서 보통 음악을 즐기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품격 있는 음질의 클래식을 들으며 꼭 먹어봐야 하는 것은 까눌레. 모뉴에트 까눌레는 지극히 제주스러운 까눌레다. 까눌레를 만들 때는 럼이 들어가는데 모뉴에트는 럼 대신 한라산 소주를 넣기 때문. 그렇다고 까눌레에서 한라산 소주 맛이 나는 것은 아니지만, 제주도 여행 중에는 제주도에서 나는 것들로 만든 음식을 먹고 싶은 여행자라면 그 기준에 딱 맞는 까눌레다.
모뉴에트 까눌레는 총 일곱 가지 맛을 갖고 있다.
- 제주 말차
- 바닐라
- 얼그레이
- 피스타치오
- 츄러스
- 인절미
- 쇼콜라
모뉴에트는 이제 막 오픈했을 때부터 찾아갔던 곳이라 예전의 메뉴 구성을 아는데 종류가 순식간에 많아졌다. 게다가 맛도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니 혼자 왔어도 반드시 여러 개를 주문해야 한다.
모뉴에트는 여행 중 총 세 번 방문했다. 한 번은 늦게 방문해 마지막 남은 까눌레 두 개를 포장했고, 나머지 두 번은 매장에서 먹었다. 가능한 많은 맛의 후기를 남기기 위해 모든 순간을 꺼낸다.
제주도 동쪽으로 넘어간 첫날, 다른 여행지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오후 다섯 시쯤 모뉴에트에 도착했다. 몇 개 안 남았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내가 마지막 까눌레 손님이 될 줄은 몰랐다.
'까눌레는 지금 인절미맛만 두 개 남아서요.'
거진 2년 만에 방문한 모뉴에트라 여러 개 먹고 싶었는데.... 슬프지만 그래도 먹을 수 있는 게 어디야-하며 인절미 두 개를 구입했다. 그날이 마지막 까눌레 두 개는 다음 날 아침, 숙소 뒤편의 오름에 올라 아침식사 대용으로 먹었다.
결론적으로 까눌레를 가장 맛있게 먹은 순간도 이번 제주도 여행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도 오름 위에서 모뉴에트의 인절미 까눌레를 먹은 날이다. 모뉴에트 인절미 까눌레는 이 날 처음 먹어본 것이었는데 기대를 훨씬 뛰어넘은 맛이었다. 넉넉하게 뿌려진 콩가루 속 단단한 까눌레 표면과 꾸덕 쫄깃 인절미 크림 같기도 떡 같기도 한 식감의 속은 지금까지 먹었던 까눌레의 틀을 뛰어넘었다. '이런 까눌레도 있구나!'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었을 정도로 일반적인 까눌레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다. 인절미 특유의 꼬수운한 맛과 카라멜맛의 조화가 훌륭하다. 단짠 다음은 '단꼬'인걸까?
게다가 먹은 장소가 무려 애정 하는 제주도 오름 위였고, 날씨도 햇살이 따사로워 멀리 보이는 바다 위에 윤슬이 가득했던 날이었으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기도 어렵다.
한 개가 아니라 두 개가 남아서 천만다행이었다.
'안 되겠다. 다른 맛도 먹어야 해' 사명감이 불쑥 올라왔다. 그날 점심시간쯤 모뉴에트를 다시 찾았고 여러 개를 주문했다. 주변 테이블 위를 보니 보통 인원 수대로 주문하는 듯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까눌레 사랑을 주문량으로 표현했다. 직원분이 '다 드시고 가시는 거죠?'라고 물어 보신 게 조금 마음에 남았지만 미련이 남은 채로 육지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두 번째 모뉴에트 방문 때 주문한 맛은 바닐라/인절미/제주 말차/얼그레이 네 가지다.
단면을 모두 기록하고자 먹기 전에 모조리 반을 갈랐다. 빠-삭한 까눌레는 나이프에 약간 힘을 주어 나이프 앞 모서리를 먼저 찔러 넣고 그래도 나머지 날을 내리면 부드러운 내면을 가르며 쉽게 두 동강이 난다.
제주 말차와 인절미 가루로 인해 접시 위가 난장판이 됐지만, 촉감 놀이를 하느라 바닥 이곳저곳에 두부와 국수를 던져 놓은 아이들의 기분처럼 즐거운 난장판이다.
까눌레는 판매하는 곳이 까눌레를 잘 만드는 곳인지 알기 위해서는 가장 베이직한 바닐라 까눌라를 먹어봐야 한다. 육지에서 충분히 다양한 브랜드의 까눌레를 먹어 왔지만 단번에 '여기다!'싶을 정도로 모뉴에트의 까눌레는 완벽한 정석에 가깝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까눌레들은 대체로 까눌레 안이 빵 같다. 생각보다 술 같은 액체를 머금은 듯한 빵의 촉촉함이 덜하다. 럼을 아껴서 그런 걸까? 굽는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된 것일까?
만약 먹었을 때 다른 디저트와 별 다른 차이점을 못 느끼거나 감흥이 없다면 그건 진정한 까눌레 맛집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까눌레는 다른 구움과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맛과 식감을 갖고 있다. 빵이라고 보기 애매할 정도여야 한다.
바로 모뉴에트처럼. 실제로 까눌레에 입덕하게 해 준 카페가 바로 '모뉴에트'다. 그전까지는 까눌레가 이런 것인 줄을 몰랐다. 이렇게까지 겉이 단단한 줄 몰랐고 속이 이렇게 부드럽고 탱글탱글하고 촉촉한 줄 몰랐다.
까눌레의 기본을 굳건히 지켜낸 상태에서 재료에 변형을 준 제주 말차와 얼그레이는 맛이 없을 리가 없다. 얼그레이는 맛도 맛이지만 홍차의 향이 은은하게 나는 것이 함께 주문했던 차와 먹기에 딱이었다. 얼그레이를 먹을 때는 꼭 티를 함께 주문하면 좋을 것 같다. 음식은 궁합도 중요한 편이니.
제주 말차는 말차 티 자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더라도 평소에 녹차/말차 케이크 수준의 씁쓸한 맛을 좋아한다면 충분히 경험해 볼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티도 즐길 정도로 말차 맛은 강도가 어떻든 좋아해서 꿀떡꿀떡 잘 먹었다.
또 먹고 싶어 주문한 인절미는 역시! 변함없이 독특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육지에서도 인절미 까눌레가 가장 아른아른거린다.
세 번째 방문 날에는 새로운 맛을 추가했다. 바로 '피스타치오'와 '츄러스'.
피스타치오는 참 신기하다. 이름을 들었을 때는 '이게 무슨 맛이 나나?'싶은데 신기하게도 피스타치오만의 맛이 있다. 물론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만큼은 아니지만, 맛을 생각하지 않고 무심결에 입에 넣어도 '음? 이거 무슨 맛이지?'싶은 그런 차별적인 맛이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모뉴에트 까눌레 중에서는 그다지 인상적인 편은 아니었다. 있으면 맛있게 먹는데 딱히 재구매 의사까지 있는 맛은 아니랄까. 아무래도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 정도의 강렬함도 아닌데 아예 다른 맛인 것도 아니고 애매한 맛의 강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츄러스는 반대로 맛은 누가 봐도 츄러스다. 겉에 묻은 시나몬가루와 설탕부터 이건 분명히 츄러스맛이 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카라멜맛 이상의 단맛을 지닌 츄러스는 내 기준에서는 과했다. 하긴 까눌레를 하나만 먹은 것도 아니고 네 개를 먹는데 츄러스의 단맛은 아무래도 혀가 '디저트는 이제 물려'라고 비죽거릴만하다. 만약 하나만 먹었다면 맛있게 먹었을 것 같지만 까눌레 덕후 인생에 까눌레를 하나만 사 먹을 일은 없기 때문에 아쉽다.
이렇게 모뉴에트에서 쇼콜라를 제외한 모든 까눌레를 먹어본 결과, 모뉴에트 까눌레는 인절미가 1등, 제주 말차가 2등, 바닐라가 3등이다(전지적 필자 시점). 아무래도 가장 처음의 인절미가 상황도 맛도 완벽도가 높아 다른 맛이 이기지 못한 것 같다. 인절미와 바닐라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크게 갈릴 수 있을 것 같으니 모뉴에트에 간다면 와르르 주문해 나만의 TOP3를 나열해보자.
서쪽 - 토투가커피
동쪽에 모뉴에트가 있다면 서쪽의 까눌라는 토투가커피가 꽉 잡고 있다. 귀덕리 어느 해안도로 바로 앞에 위치한 카페 공간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한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소박하다. 카페 벽을 따라 있는 의자와 바 테이블의 의자 3~4개쯤이 다이고 일행과 마주 앉을 수도 없다. 장시간 앉아있기보다는 창밖의 바다를 보며 음료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을 흘려보내고 다시 일어설만한 카페다. 인테리어도 감성 카페라기에는 제주도의 카페 인테리어가 워낙 상향 평준화되어있어 부족함이 있다.
이렇게 메뉴 외의 것들만 보면 굳이 찾아가지 않을 것 같지만, 토투가커피 메뉴는 거의 매일 정해진 마감 시간보다 일찍 소진된다. 바로 '까눌레' 때문이다.
토투가커피의 까눌레는 모뉴에트와 비교했을 때 다소 오버쿡된 비주얼이다. 더 꺼뭇하다. 언뜻 보면 '태운 거 아니야?'싶을 수도 있을 정도로 색이 어둡다. 그 만큼 겉도 훨씬 단단하다. 빠-삭과 딱딱의 중간으로 '이쯤되면 속도 예상과 다를 수 있겠는데?' 생각하며 자르게 된다.
토투가커피의 까눌레는 총 다섯 가지 맛이 있는데 라인업은 매번 달라진다. 방문했을 때 있는 모든 까눌레 라인업을 주문했는데 럼바닐라/밀크티/에멘탈치즈/코코넛 이렇게 네 가지다.
육안으로 봐도 모뉴에트와 토투가 커피의 까눌레는 속도 확연히 다르다. 토투가 커피가 훨씬 촉촉하다. 촉촉을 넘어 축축함에 가깝다. 빵이 습기에 문들어진 듯하다. 그래서 먹어보면 티라미수의 빵 부분을 먹는 것 같기도 브레드 푸딩을 먹는 것 같기도 하다. 보통 먹는 까눌레와 확연히 다른 비주얼과 식감에 까눌레의 세계도 참 넓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구멍도 훨씬 크게 났다. 모뉴에트는 구멍이 나도 알차게 겉을 채웠는데, 토투가 커피는 빈 공간이 많다. 까눌레 레시피를 찾아보니 구멍이 크면 안 된다는데 요리도 창작이라 안 되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맛까지 있는데. 맛은 달고나를 녹였을 때 나는 그것과 비슷한 카라멜맛이 강한 편이다. 비주얼도 맛도 강렬한 까눌레다.
가장 맛있었던 맛은 '에멘탈 치즈'. 까눌레 덕후에게 맛있는 까눌레는 그저 맛있으면 안 된다. 먹었을 때 뭔가 다름이 바로 느껴져야 한다. 그 기준에 완벽하게 들어온 맛이 '에멘탈 치즈'다. 까눌레 크기를 생각하면 꽤 길쭉한 크기의 치즈가 겉과 안을 채웠다. 그만큼 치즈맛이 강렬한데 까눌레의 달달한 맛과 합쳐져 단짠을 이뤘다. 역시 단짠은 궁극의 맛이다.
토투가커피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맛은 '에멘탈치즈'와 '럼바닐라'다. 럼바닐라는 타이틀 자체는 분명 기본적인데 토투가커피만의 맛이 워낙 예상을 벗어나 특별했던 반전의 맛이었기에 선택했다.
세어보니 6박 7일간 제주도에서 먹은 까눌레 개수가 14개다. 혼자 14개의 까눌레는 다 먹고 배를 똥똥거리며 돌아왔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먹는 건 풀떼ㄱ...아니 샐러드다. 그래도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는다. 심각하게 맛있었는데 후회는 무슨. 훈장이라도 받은 것처럼 뿌듯하다.
장담하는데 또다시 제주도를 간다는 무조건 까눌레는 또 먹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