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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Mar 05. 2022

비빔밥을 닮은 도시, 전주

뿌듯함 한 젓가락, 감사함 한 스푼, 아쉬움 톡톡



갈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최근 3개월에 비하면 온난한 날씨라 이곳저곳 가고 싶은 도시들이 있기는 했지만, 전주는 떠올린 적이 없었다.

어느 날, 전주로 당일치기를 다녀왔다는 지인의 근황 토크가 마음에 퉁- 묵직한 느낌표를 줬다.

'전주? 그러고 보니 전주 다녀온 지가 어언...'

오 년 전쯤일까. 한창 전주가 전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도시일 때 다녀온 게 마지막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KTX 열차 티켓을 끊었다. 여행은 역시 고민보다 GO지.


전주는 익숙한 듯 새로웠다. 정확한 시점이 떠오르지 않는 과거의 전주와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인기가 급부상한 도시들의 풍경은 달마다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주라고 예외는 없었다.

과거의 기억에서 버전 업데이트된 전주의 2022년은 다음과 같았다.




가맥집이 편의점만큼 많은 곳

객리단길과 전주 한옥마을 덕진구 일대를 걸으면서 의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맥집이 많다. '많다'라는 글자로는 그 신기함을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편의점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자주 간판이 보인다. 처음에는 가맥집 거리인가 보다-했는데 그냥 도시 자체가 가맥집이다. 주택가에도 객리단길의 몇 골목들에도 한옥마을 주변에도 가맥집 간판이 있다. 전주가 가맥이 유명한가? 통영의 다찌집 같은 그런 존재인 걸까? 전주 토박이분들은 가볍게 마시는 술자리를 좋아하셨던 걸까? 전주 가맥 축제도 있을 정도이니 전주의 고유한 문화임은 틀림없는데 유래는 검색을 해도 찾지 못했다.


'가맥집'은 사실 동네 슈퍼마켓에서 테이블 몇 개 놓고 병맥주에 과자나 라면 같은 비교적 빠르게 조리되는 안줏거리를 판매하는 가게를 말한다. 그런데 법적으로 슈퍼마켓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것은 불법이라 전주의 가맥집은 일반 호프집처럼 가게를 정식으로 차려놓고 운영하고 있다. 그래도 호프집과는 또 다른 풍경이기에 정통 가맥집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선한 경험임은 틀림없다.

경험 빼면 또 시체이니 유명한 몇 곳 중 고민하다 고추치킨에 끌려 <영동슈퍼>를 선택했다. 오직 맥주만을 판매하고 알아서 꺼내다 마시면 되는 것이 세계 맥주점 같기도 했다. 그 생각은 고추치킨과 발가락이 선명한 닭발이 등장하면서부터 지극히 한국스러워졌지만.

비록 변형된 가맥집이라고 해도 얇고 바삭(바삭 그 이상의 빠삭)하게 튀긴 고추치킨을 소금에 찍어 먹는 순간, 공간감이 달라졌다. 노포에서 별다른 네이밍 없이 내놓는 옛날 치킨의 맛이다. 늦어도 50분이면 집 문 앞에 도착하는 프랜차이즈 치킨집에서 아무리 신메뉴가 나와도 흉내 내지 못할 옛날 치킨 맛. 별다른 양념 없이 소금에 찍어 먹는 게 국룰인 맛. 전주에 사는 분들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 맛을 아무리 멀어도 버스 타면 만날 수 있다니. 꼭 충격적인 맛집들은 내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 있더라.

전주 음식은 다 맛있더라니 안주 맛까지 놀랍다. 진정한 맛의 도시다.



타지 사람에 대한 친절함이 끊이지 않았던 곳

여행을 하다 보면 불친절한 분들을 으레 만난다. 아무리 풍경 예쁘고 인프라가 잘 되어 있는 곳이라도 '일하기 정말 싫으신가 보다' 헛웃음 한 번 치게 만드는 분과 한 번쯤 마주치기 마련인데 아무리 바쁜 곳에 가도 아무리 손님 없는 곳에 가도 언제나 중간 이상의 친절함이 있었다. 보통 사람한테 '친절하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살가운 느낌을 받으려면 평균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야 한다. 유독 말투가 정성스럽다던가 세심하게 물어봐 준다거나 행동에서 느껴지는 열정 같은 것이 있지 않는 이상, '와 엄청 친절하시다'라는 생각은 잘 떠오르지 않는데 전주에서 만난 거의 모든 분들이 감사할 정도로 친절하셨다.

특히 사람이 많아 바쁜 카페와 호떡집에서 들은 말투에서는 누가 봐도 타지 사람이지만 대충 대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이 포장지를 이렇게 뜯어먹으면 편하게 먹을 수 있어요.'

'이 음료는 휘휘- 잘 저어서 드셔야 맛있어요.'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이곳저곳에서 하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서비스직에 종사하면서 모두에게 높은 친절함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극한의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불친절한 직원분들의 마음을 이해되는데 전주에서는 그런 노력이 필요 없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최근 제주도에서 택시 기사님의 불친절 끝판왕을 경험하고 택시 타는 것이 썩 끌리지 않았는데, 전주에서 만난 택시 기사님은 근처 맛집까지 알려주시며 호탕한 말투를 드러내셨다. 택시 기사들의 말은 듣기 불편하다는 일련의 편견을 충분히 녹인 시간들이다. 덕분에 제주도에서의 불편한 기억에 마데카솔을 발랐다.



비빔밥 같은 도시

앞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전주는 미식 도시가 분명하다. 그 인기가 점점 커져 이제는 본연의 미식 매력에 변화가 생겼지만 음식의 맛이 상향 평준화되어 있는 것은 틀림없다.

꼭 전주 음식이 아니더라도 많은 것들을 입에 넣었다. 과일 모찌부터 치즈 호떡 칼국수 김밥 육전 어묵탕이 일부인데 먹을 때마다 '사 먹길 잘했다!' 뿌듯할 정도로 맛있었다.

과일모찌 안에 과일이 어찌나 크고 진하던지. 전주 한옥마을에 가면 과일모찌는 필수다. 특히 홍시모찌는 처음 먹어 본 종류인데 맛에 대한 경험의 폭이 넓어진 순간이었다.

아니 과일모찌가 이렇게 맛있을 일인가
여행할 때마다 봤는데 왜 이제 먹어 본 거지?
비싼 한식집들 사이에 숨은 찐맛집(분식점)
신상술집마저 고퀄리티면 어쨰
녹차맛이 보성녹차밭 아이스크림보다 진했던 카페 아이스크림

이번 전주여행은 평소와 다르게 무계획 여행이라 모든 곳이 맛집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간식까지 죄다 맛집이었다. 어느 곳 하나 아쉽지 않았으니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전주 편에서 '전주는 만화방 라면도 남다르다'라고 했던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행이란 본디 아쉬워야 백점 아니겠나. 미련이 없으면 오히려 재방문의사가 없으니 별 다섯 개 중 네 개만 칠한 셈이다.

때로는 신기하고 순간순간 맛있었던 전주여행에서 든 아쉬움은 한옥마을 형태가 사라지고 있다는 점과 먹거리에 비해 볼거리 즐길거리가 부재하다는 것이다.

한옥마을이지만 한옥이 없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지붕이 낮고 기왓장도 있지만 간판에 의해 광고판으로 인해 인테리어로 인해 한옥의 형태가 가려지거나 변형된 경우가 많았다. 메인 스트리트를 걸으면 그 정도가 심해 몇몇 한옥카페를 보지 않으면 한옥마을이라는 것도 잊기 쉽다. 번화가가 되면 관광지가 되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네가 가진 본연의 특색이 희미해지는 것이 못내 아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전주여행을 되돌아보면 먹기만 했다. 미식의 도시에 왔으니 당연하지만, 그 외 시간에 할 게 없다. 배가 부르면 그때부터 심심해진다. 전주여행 전 후기를 볼 때 다들 2박까지만 하던데 다 이유가 있었다. 볼거리가 없다. 애매한 벽화마을과 계절을 타는 근린공원, 공사 중인 전동성당. 추천할만한 볼거리는 카카오프렌즈와 경기전뿐이다. 전주가 3박 이상의 다채로운 재미를 갖추려면 볼거리도 먹거리만큼 채워져야 하지 않을까.


왜 가맥집이 그렇게 많은지 여전히 의아한 여운, 배를 퉁퉁 두들기며 역시 맛 보장 도시라는 든든함, 끊임없는 친절함. 그 위에 아쉬움 두 스푼까지 들어있는 전주는 비빔밥 같다. 다음번에 찾아갔을 때는 비빔밥 재료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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