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스테이를 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건 작년 11월쯤부터다. 5월 따뜻한 날에 법주사를 다녀온 뒤로 꾸역꾸역 속세의 버거움을 쌓아가고 있다는 걸 속으로는 인지하고 있었는데 막상 가려니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는 거다. 템플스테이 홈페이지를 몇 번을 검색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서성이다가 12월에 예약한 여섯 번째 템플스테이, 봉선사다.
한 달 전에 예약한 템플스테이가 소원 성취하게 해 줄 가능성은? 눈 내린 사찰에서 한 번쯤 지내보고 싶었다. 그건 마치 장시간 나는 비행기 안에서 오로라 한번 봤으면 하는 일종의 행운을 갈망하는 것과 같았다. 겨울이라고 매일 눈이 오는 것도 아니고 대체로 일주일 전 혹은 그전에 예약해야 하는 템플스테이 특성상 눈이 쌓일 만큼 함박눈 오는 날을 맞추기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추는 것만큼 어렵다.
그런데 사찰 입소 전날 눈이 왔다. 그것도 펑펑.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하얀 사찰을 볼 줄은 몰랐던 게 서울에서는 쌓인다는 체감을 못 했다. 차들이 죄다 밟아 아스팔트 위에서 시커먼 물이 될 뿐이었으니까.
새해 첫 주부터 소원을 이룰 거라는 걸 인지한 건 봉선사 가는 버스 안 창밖을 보면서다. 점점 아파트가 보이지 않고 건물의 키가 줄어들고 군부대를 지나면서 점점 쌓인 눈이 두꺼워지고 넓어졌다. 헝. 나 진짜 눈 내린 사찰에서 1박 2일을 지내나 봐! 홀리~
눈 사람을 만들어도 될 정도로 눈이 많이 왔다 사찰은 겨울왕국이었다. 기왓장 나무 석탑 바위 얼어버린 연못 위 등 눈이 앉을 수 있는 모든 곳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본래의 것을 무너뜨리지 않고 살포시 내려앉은 차분한 모습이 퍽 사찰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혼자 가서 다른 혼자 온 일행분과 한 방을 썼는데 서로 인증샷을 열심히 남겼다.
"이렇게 눈 온 날 템플스테이도 오고 우리 운 엄청 좋은 것 같아요!"
"맞아요. 저도 이렇게 눈 온 줄은 몰랐어요."
이런 행운이 어딨냐며 호들갑 떨었던 대화가 기억난다.
사진을 찍으며 생각한 건데 검정 롱패딩 대신 흰색 뽀글이를 선택한 건 흡족해할 만한 일이었다. 흰 눈이랑 찰떡이잖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가장 편한 바지라고 생각하는 회색 법복 바지와도 잘 어울리고.
템플스테이 첫 일정인 오리엔테이션이 끝나면 스님과 사찰 주요 공간을 다니며 역사적 혹은 문화적 해설을 듣는다. 수련복을 입고 스님을 따라다니는 모습이 제삼자의 눈에서 보면 삐약이 같겠는데- 생각하며 졸졸 쫓아다녔다.
봉선사는 이전에도 자주 나들이로 왔던 곳인데 설명을 들으니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봉선사 대웅전은 특이하게 '큰 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을 올려 뒀는데 팔만대장경 목판을 탁본하여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탁본을 한글로 번역한 곳이 바로 '봉선사'라고 한다.
스님의 설명을 따라 사찰 투어를 마치고 저녁공양을 먹은 뒤 자유시간이 주어져 혼자 봉선사 구석구석을 산책했다. 법복 바지 펄럭이며 사람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얼어붙은 연못 위에 쌓인 눈도 구경하고 시야를 멀리 두며 눈길을 걷기도 했다. 익숙했던 봉선사에 함박눈이 찾아오니 어디 멀리 여행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눈만 와도 이렇게 달라지는구나. 역시 어디든 다 안다고 할 수 없어.
걷다가 문득 어릴 적 들었던 '파란 나라' 동요가 생각났다(알고 보니 원래는 가요라고...).
[파란 나라를 보았니 꿈과 사랑이 가득한
파란 나라를 보았니 천사들이 사는 나라
파란 나라를 보았니 맑은 강물이 흐르는
파란 나라를 보았니 울타리가 없는 나라...(이하 생략)]
이렇게 파란 나라를 반복하는 노래인데 하얀 버전으로 만들면 딱이다. 하얀 사찰을 보았니.
나는 이렇게 속으로 '하얀 사찰을 보았니~' 부르고 있는데 저 멀리 혼자 연신 연못 일대를 돌고 도는 어느 스님께서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궁금했다.
하얀 사찰의 하이라이트는 '108배'다. 무릎이 욱신거릴 때쯤 끝이 나는 108배는 염주도 함께 만들어야 제맛!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색으로 변한 풍경을 보며 직접 만든 염주를 대롱대롱 흔들며 숙소로 향하면 곧 소등시간이다. 저녁 아홉 시, 사찰의 하루는 저문다. 왜 이렇게 일찍 자냐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새벽 다섯 시 일출 시각 훨씬 전에 일어나야 한다.
다음 날, 너무 놀랐다. 어제 본 사찰의 풍경과 또 달랐기 때문이다. 해가 뜨기 전 새벽 예불을 들을 때도 아침 공양을 먹을 때까지도 깜깜해서 몰랐는데 아니 더 새하얀 세상이 된 게 아닌가! 나무들과 그 뒤의 산까지 죄다 하얗게 백발처럼 변했다. '눈도 안 왔는데?' 하며 자세히 보니 기온 더 떨어져서 죄다 상고대가 꼈더라. 남들은 산행으로 상고대를 찾아 가는데 숙소 앞에 상고대가 가득하니 이거 원 새해초부터 이렇게 복을 많이 주시면 감사합니다.
흐린 날씨라 일출은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어떠랴. 이렇게 희귀한 풍경들을 눈에 잔뜩 담았는데. 충분히 차고 넘치게 행복한 아침이었다. 진정한 굿모닝!
눈이 온 뒤에도 매일같이 풍경이 변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시간이었다. 세상에 좀 더 세심한 관심을 갖자. 자연에는 특히 더.
봉선사 템플스테이 첫날의 하이라이트가 108배였다면, 마지막 날의 하이라이트는 '비밀의 숲 포행'이다. 유네스코생물권보전지역인 광릉숲 중에서도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구간을 갈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다. 오직 템플스테이 참가자만 이 구간을 걸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숲길이 아니라 스키장인 줄 알았다. 눈이 20cm는 쌓인 것 같았다. 올 겨울 내린 모든 눈이 녹지 않은 듯한 두께가 꼭 사막의 눈버전 같았다. 걷는 만큼 앞으로 나가지 않아 발을 빨리 놀려 나아가야 했다. 길이 동네 뒷산 정도의 오르막이라 더 눈을 파헤치고 가는 기분이었다.
생각했던 숲길 포행은 아니었지만 눈을 뚫고 가는 듯한 걸음은 아기들이 촉감놀이를 할 때만큼 신기하고 새로운 경험이었다. 소리도 그렇게 큰 뽀드득뽀드득 소리는 난생처음이었다. 꼭 아이들 신발 중 걸을 때마다 뽁뽁 소리 나는 귀여운 신발을 신은 것처럼 반복적으로 접시 빡빡 닦은 뒤의 소리가 났다.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숲은 판타지 영화 촬영지 같다. 길이라고 해야 할지 그냥 눈 쌓인 곳을 따라 걷는 거라고 해야 할지 모를 상식 밖의 숲길은 다른 나라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이런 세상이 아직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정도다. 아니면 내가 이 템플스테이를 신청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거나.
한껏 얼어붙은 손과 발을 녹이는 데에는 사찰 카페만 한 게 없다. 사찰 내 있는 카페에서 유자차를 사 마시고 퇴소했다. 거의 추운 날 먹는 어묵 국물급으로 손도 속도 녹았다. 유자의 달달한 맛은 미각마저 녹였다.
하얀 눈밭 위에서 유자차를 마시는 순간마저 낭만적이었다. 하 행복 멀리 있지 않구먼!
곱씹을수록 소중해지는 추억이 있다. 그 시간에 머물고 있을 때 가장 절정일 것 같지만 다녀온 뒤에도 무럭무럭 애정의 키가 자라는 그런 추억들. 그 추억 서랍 속에 이번 봉선사 템플스테이를 넣었다. 하얀 사찰에서 오감을 생생하게 깨우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세심하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들은 날씨와 반대로 따뜻하다.
▼ 봉선사 템플스테이 정보와 자세한 후기는 블로그에 따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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