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흥국사 템플스테이 여행기
이번 템플스테이는 사찰을 고르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홍길동처럼 이리 뿅-저리 뿅- 다니는 여행자가 일곱 번의 템플스테이까지 다녀왔으니 유명한 사찰들은 이미 다녀온 경우가 많았다(또 가도 되지만 이번에는 내키지 않았다). 더군다나 볼거리가 많거나 체험 프로그램이 잘 갖춰진 곳을 가고 싶어 일일이 일정표들을 살펴보느라 과정이 길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약 3주가 흐른 끝에 예약한 곳이 '흥국사'다.
다녀온 소감까지 포함한다면 흥국사는 이번 검색 조건에 딱 맞아떨어진 사찰이다.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체험형 타임테이블 속 프로그램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사찰 자체도 첫 방문인 곳이었다.
모든 템플스테이가 그렇듯 오리엔테이션을 제외하면 첫 프로그램은 사찰투어다. 보살님께서 마치 초대한 집에 처음 온 손님에게 방을 하나하나 소개하듯 안내하는데 걸으며, 집 소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공간에 그려진 그림이나 공간 자체에 대한 역사를 이야기하듯 풀어낸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사찰 투어 시간에 가장 높은 집중력을 발휘한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알면 그 공간이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다녀와서 남는 것도 풍부해져 전체적으로 템플스테이 경험 퀄리티가 훅 높아진다.
도심에 있는 사찰은 역사가 깊지 않을 것 같은 편향을 완벽하게 깨는 곳이 흥국사였다. 흥국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조선시대 때 영조가 행차한 사찰이라고 한다. 그 흔적을 지금도 찾을 수 있는 것이 대웅전 역할을 하는 약사전 기와 중 세 장만 색상이 짙은 녹색을 띤다. 이렇게 대웅전 기와 중 일부만 기와 색이 다르면 왕이 행차한 사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앞으로 사찰만 가면 기와를 유심히 볼 것 같은 새로운 상식이다.
이외에도 흥국사에서는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극락구품도 불화도 볼 수 있다.
사찰은 대체로 산에 붙어 있지만 그럼에도 템플스테이를 예약할 때 붙어있는 산을 뒷산 삼아 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데 이는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더 보고 더 많이 걷는 여행을 선호하는 성향과 연결되는 준비 과정이다. 사찰 간 김에 산도 함께 보면 일석이조 아닌가.
흥국사는 노고산에 둘러싸여 있는 사찰이라 뒤로 노고산을 올라갈 수 있는 등산로와 둘레길이 나 있다.
둘레길을 걸어 보고 오라는 보살님 말씀에 냉큼 앞장서다시피 당차고 빠른 걸음으로 올랐는데 수북한 낙엽 때문에 길도 실제 땅이 닿는 위치도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게 둘레길이 맞나-싶은 심정으로 순간순간 예측하며 한 바퀴 돌았는데 하마터면 둘레길이 아니라 등산을 할 뻔했다. '노고산은 시작부터 호락호락하지 않은 산이구나' 생각하며 우당탕 소리 나는 산책(?)을 마쳤다.
원래 산에서 내려오면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나름 노고산을 걸어보고 왔다고 다음에는 강정을 만들어 먹었다. 강정을 만들어 보다니! 매번 가판대에서 네모난 모양으로 마주하던 강정의 이전 모습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귀하면서 흥미로웠다. 현미와 조청을 섞어 열을 주며 볶고 네모난 틀에 부어 형태를 만든 다음, 철퍼덕 엎어 나온 한판을 칼로 잘라 우리가 평소에 보던 직사각형 모양의 강정으로 탄생시키는 과정이다. 사찰 버전의 쿠킹 원데이클래스는 어릴 적 하던 찰흙 놀이만큼 웃게 되는 시간이었다. 칼로 썰 때 '바사삭' 소리가 엄청 크게 들린다는 걸, 모양을 만들기 전에 수북이 쌓여 있는 현미&조정 조합을 그냥 떼어먹어도 맛있다는 걸 30년 만에 알았다.
템플스테이를 좋아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나물도 평균 이상으로 좋아하니.
또 마침 정월대보름 하루 전 날 입소해서 이틀 동안 나물을 실컷 먹었다. 아이 참 사찰에서 만드는 무채나물은 왜 이렇게 맛있는지. 하얀색의 말랑한 듯 식감이 있는 고소한 무채 나물은 은근히 밖에서 만나기 어려운 나물이라 있을 때 실컷 먹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찰이 밥과 반찬을 담을 그릇을 두 가지로 제공한다. 하나는 넓적한 그릇, 또 하나는 사진과 같은 양푼 그릇인데 그러면 대체로 양푼 그릇을 택한다. 고추장까지 넣어 비빔밥으로 만들어 먹으면 허겁지겁 먹게 되는 맛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고추장과 참기름 그리고 나물은 먹어도 되니 부처님도 비빔밥을 좋아하셨던 거 아닐까.
저녁 공양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와. 스위스 마테호른 일몰이 한국에도 있었구나! 이건 무조건 실제로 봐야 한다. 노고산과 북한산 봉우리는 암벽으로 이루어져 눈으로 보기에 흰색에 가까운데 그 봉우리들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시간이 일몰 시간이다. 그 풍경 앞에 사찰의 고즈넉한 모습이라니. 이 정도면 작위적인 수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벽한 요소들의 총합이었다.
템플스테이가 아니면 때 맞춰 보기 힘들 풍경이다. 흥국사 안 왔으면 어쩔 뻔했냐며 내적 호들갑을 떨며 한참을 바라봤다.
해질 무렵 저녁 예불을 마치고 나오면 그새 캄캄한 어둠이 찾아와 있다. 사찰의 하루는 취침 시간을 몇 시간 남기지 않는 마무리에 가까운 시간이 된다.
템플스테이 첫날의 마무리는 '스님과의 차담' 그리고 '염주 팔찌 만들기'다. 스님과의 차담은 스님의 스케줄에 맞춰 진행되기에 미리 안내가 되어 있어도 막상 사찰에 입소하면 못 하고 나오는 경우도 다반사인데, 운 좋게도 이번에는 스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차담은 참 묘하다. 하기 전에는 참여하고 싶은데 막상 스님과 마주하면 입이 안 떨어지는 묘한 굴레가 있다. 어느 사찰이든 다 똑같다. 템플스테이 참가자가 먼저 입을 여는 걸 보지 못했다. 스님께서도 그 굴레를 아시는지 먼저 질문을 던져주셨고 덕분에 입을 열 수 있었다.
30살은 '이립'이라는 말씀이 꽂혀 그날 밤에도 퇴소 후에도 계속 그 말씀을 떠올렸다. 나는 30대를 어떻게 만들어갈지 어떤 고민을 하며 성장할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템플스테이는 언제나 퇴소하고 집 가는 길에 최고조로 뿌듯하다. 많은 유형의 여행이 있지만 명확하게 다른 유형들과 차별화된 테마 여행이 템플스테이인 것 같다. 문화와 역사 그리고 수행과 비움까지 경험하는 시간이니. 역시 발은 최대한 많이 움직여야 한다며 가볍게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이제 고양시에 대해 누군가 물으면 아주 크게 말할 수 있는 게 생겼다. 역사책에 나올 법한 깊은 역사가 존재하고 그 흔적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템플스테이에 참가한 사람들의 역사까지도 다채로워지게 만드는 곳이 고양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