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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Nov 23. 2022

가봤어도 다시 한번, 제주도

여행에 다 아는 건 없다

전주를 왔어요 우리가 오늘.
그러면 내일 우리가 돌아가서 전주를 안다고 할 수 있나요? 모르죠.
북한산에 하루 갔다 왔을 때, 내가 북한산을 갔다 왔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북한산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tvn 알쓸신잡 8화 중




몇 번째 제주도인지 모르겠다. 이제 횟수를 세는  의미가 없는 제주도행 비행기에 또 한 번 올랐다. 분명 올해 3월에도 제주도를 갔는데도 그 사이에 수많은 여행이 있어서 그런지 몇 년 만에 가는 기분이었다. "올해 갔었다고?" 폴더 속 사진을 다시 클릭했을 정도로 체감상으로는 오랜만의 제주도였다.

3박 4일간 딱 제주도의 절반을 여행했다. 동쪽을 무대로 계획파 여행자답게 부지런히 다녔는데 80%가 이미 가본 장소였는데도 처음 본 풍경처럼 새로웠다. 올해 다녀왔는데도 처음 가 본 것 같은 기분처럼 말이다.

특히 풍경마다 특정 수식어를 떠오르게 했는데 다녀온 시점에서 총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웅장한

제주도에서 거대하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경험은 흔히 하게 된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네스코 자연 과학 분야 3관왕*을 달성했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아니더라도 여행자 입장에서 산 오름 해안절벽 등 대자연 위에 서 있으면 으레 느끼는 경험이다. 역시 제주도는 자연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의 모양이 바뀐 건 제주도 '빛의 벙커'에서다. 미술을 토대로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는 문화 예술 공간 '빛의 벙커'는 제주도 여행을 한 두 번만 해도 들어봤거나 가봤을 확률이 높은 대표적인 여행지다.

그럼에도 이제야 처음 가본 건 하늘을 볼 수 있는 곳만이 제주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했던 과거 때문이다. 제주도를 사랑하는 이유는 하늘이 보이는 길과 마을과 바다 그리고 초록빛 자연의 산물들이라 굳이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장소를 택하고 싶진 않았다.

그럼에도 짧은 일정 속에서 빛의 벙커를 선택한 이유는 가족여행이라는 취지를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한 나름의 전략 그리고 부쩍 미술에 관심이 많아진 취향의 콜라보 덕분이다.


*제주도는 유네스코 세계 지질공원∙생물권 보전지역∙세계 자연유산 3개 부문에 모두 등재된 세계 유일 섬이다. 특정 지역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 전 지역이 등재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창고 같은 한 공간에 미디어아트가 나올 거라는 단순한 생각만 가지고 간 빛의 벙커는 제주도에서 지금껏 만나지 못한 웅장함을 보여줬다.

선명하고 거대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클래식 선곡과 미디어아트의 조화가 상상을 훨씬 벗어났다. 어떻게 평면 그림을 이렇게 쪼개고 붙였지? 세잔의 작품을 역동적으로 구성한 전시 내용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기존의 한 묶음이라 생각했던 그림의 요소 하나하나를 따로 보여줌으로써 작은 요소들도 한 점의 그림만큼 뛰어남을 보여주는 디테일. 바닥과 벽을 하나의 그림으로 만들어 작품 언에 관람객이 서 있는 적극적인 참여를 꾀하는 모습. 

자유롭게 감상하고 싶은 포인트에서 털푸덕 바닥에 앉아 작품을 감상하는 모습도 이색적이었다. '이 선을 넘지 마시오'가 쓰여 있는 미술관에서 거리감을 두고 바라보는 방식보다 역동적인 빛의 벙커의 관람 방식은 오름에 올라 아무 데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전망을 바라보는 행위와 흡사했다. 

모든 상상과 기대 그 이상을 보여주는 것. 언제나 하늘이 보이는 제주도의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라는 나 또한 그 풍경을 볼 때의 나와 다를 바가 없었고. 실내라고 해서 제주도가 아닌 것은 아닌데 나야말로 평면 그림 같은 생각을 해왔다는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슬픈

슬펐는데 재미있다고 말할 때가 있다. 그건 마치 놀이공원에서 하늘까지 올라갈듯한 놀이기구를 타면서 "괜히 탔어" 징징대면서 막상 떨어지고 나면 "재밌다! 또 타자!"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인과 관계다. 그런 이상한 순간이 제주도에도 있다. 

'해녀의 부엌'은 수 십 년을 바다에서 살아온 실제 해녀분들과 관객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연이다. 추천을 자주 받았다가 올해 초에 처음 가봤는데 충격적이다 못해 단단히 반해 꼭 가족들을 보여주자는 다짐을 했고 이번 여행에 그 다짐을 실현했다.

해녀의 부엌은 공연과 이야기 그리고 뷔페식 그리고 인터뷰로 구성된다. 해녀가 공연에 참여하고 제주 해산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음식을 대접한다는 점에서 이보다 이색적인 경험도 없다. 

해녀의 부엌을 예매하기 전에는 해녀에 대해 '대단하다'는 존경과 놀라움 그리고 신기함도 조금 묻어있는 감정만 있었다. 숨비소리를 내며 깊은 곳까지 내려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행위 그 자체만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대단한 행위를 하는 여자의 삶까지 알고 있다. 처절하고 억울한 슬픔이 그들이 삶의 터전으로 삼은 바다만큼 깊다는 사실을.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한 그녀들의 움직임을. 나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 나게 해주는 해녀분들의 목소리는 두 번째여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번에 함께 한 엄마께서는 연신 눈물을 닦아야 했다.

그럼에도 나오면서 말씀하셨다. 

"왜 네가 그렇게 여길 가자고 했는지 알겠네. 재밌네."


반짝이는

제주도에서 윤슬*은 발견하기 쉽기도 어렵기도 하다. 난이도가 애매한 이유는 날씨와 운 사이 어딘가에서 반짝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섬이어도 섬은 섬이다. 사계절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마을을 이동할 때마다 하늘이 깨끗하기도 비가 오기도 안개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자욱하기도 하다. '제주도 날씨는 어때요!'라고 명확하게 말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발견하기 쉽다는 말을 언급한 이유는 지금까지 타율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행 갈 때마다 한 번씩은 보고 돌아오니까. 여행자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는 섬이다. 

윤슬은 대체로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일출 명소로 유명한 새섬과 가까운 자구리에서 볼 수 있었는데 자구리라는 곳도 있는 줄 몰랐고 솔동산로를 따라 바다 방향으로 산책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 산책하다가 보석 동굴을 발견했다. 검고 거친 바위 주변으로 잘게 부서져 둥둥 떠 있는 빛들의 아름다운 정도를 생각하면 동굴에서 자라는 보석들을 발견한 것과 동일하게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제주도의 바다를 볼 때면 역시 제주도는 다 알 수 없는 곳이라는 확신을 또 한 번 하게 된다.


*윤슬: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잔잔한

제주도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를 단 하나의 수식어도 표현하면 '잔잔한'이 될 수 있을 거다. 잔잔한 풍경은 힘이 세다. 안고 있던 화의 울퉁불퉁함을 다듬어 주기도 하고 슬픈 마음을 맑은 날의 제주도 바다처럼 다독여주기도 한다. 신나는 마음 또한 과유불급. 그야말로 감정선을 잔잔하게 만들어준다. 

제주도에서 그런 상태가 되는 건 난이도 최하다. 해안도로를 따라 숱하게 있는 초등학교들을 찾아가면 된다. 들어갈 필요도 없다. 멀리서 바라볼 때 더 효력이 크니. 

보기만 해도 새싹이 자라나는 영상이 머릿속에 재생되는 아기자기한 색감들이 학교 곳곳을 채우고 있는데 마치 어느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학교들 같다. 영화는 현실을 배경으로 시작된다더니 일말의 진실이 있다. 

사실 제주도의 잔잔함은 어디를 찾아가기 전에 먼저 여행자를 찾아오기도 한다. 우연히 발견한 지구 밖 행성이 "나 여기 있어~!"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을 발견하기도 하고, 지구는 네모라고 말했던 과거 사람들의 생각이 그럴만해질 만큼 진한 수평선을 마주하게 될 때가 그중 하나다. 이쯤 되면 제주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주도도 알아주고 있는 건 아닐까. 




어릴 적, 제주도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면서 살겠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철없던 시절 그저 제주도를 갈 때마다 게스트하우스 마당 혹은 옥상에서 일대 풍경들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생각한 그림이고 지금은 더 이상 그 생각을 하지 않지만, 한 가지 유지하고 있는 건 제주도에 대한 애정의 크기다.

한달살이를 해도 사계절을 모두 경험해도 한라산에 올라도 몇 시간을 걸어도 여전히 새롭고 육지에 있으면 또다시 그리워지는 제주도를 다 아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다.

물론 나 역시 그 순간이 영원히 오지 않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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