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뚜벅이는 윤슬 Nov 02. 2022

가을의 순천은 '순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 조계산 트레킹 후기

사람은 딱 경험한 것 안에서 그 대상을 판단한다. 특정 지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녀온 여행지에 대한 기억이 그 지역에 대한 전체적인 상(相)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순천에 대해서도 흐드러지게 피는 갈대와 하루 안에 다 돌기 어려운 국가정원이 있는 곳. 일몰이 장관인 곳이라 정의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생각의 영역이 그것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의 그릇이 넓어진 건 2022년 가을 정점의 어느 주말 덕분이다.


서울에서 무려 당일치기로 다녀온 순천이다. 어떻게 서울에서 거의 극과 극인 순천까지 당일치기가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여행사 당일 버스투어 덕분이다. 뚜벅이 여행자가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어려운 곳을 가는 방법 중 가장 편한 방법이 '버스투어'다. 특히 가을에는 워낙 많은 등산객들이 투어 상품을 이용하기 때문에 산사나 트레킹을 주제로 한 투어 상품이 많아 뚜벅이 여행자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가을이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즌이다.

다녀온 여행 상품은 '조계산 단풍 트레킹'. 트레킹을 제대로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사찰까지 두 곳을 본다? 예약을 안 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해가 뜨기도 전에 집을 나서 잠실역으로 향했고 광화문에서 출발해 잠실역을 경유하는 관광버스에 올라탔다.


좌) 선암사 은행나무 / 우) 송광사

이번 트레킹으로 다녀온 사찰은 총 두 곳으로 '선암사'와 '송광사'다.

선암사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손꼽히기도 하고 홍매화 해우소 등 어떤 요소를 기준으로 내세우더라도 꼭 이름이 등장하는 산사라, 사찰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한 번쯤 듣게 되는 곳이다.

송광사는 이번 트레킹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찰이다. 알고 보니 한국에서 세 곳밖에 없는 *삼보사찰 중 한 곳이더라. 그밖에도 단풍 명소와 템플스테이로 유명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찰이다.


*삼보사찰: 불・법・승 세 영역에서 모두 보물을 간직한 한국 불교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사찰.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을 삼보사찰이라 칭한다.

선암사의 승선교. 반듯한 곡선이 아름다운 다리다

두 사찰을 잇는 트레킹 코스는 루트만 보면 간단하다. 선암사 옆 숲길로 진입해 '천년불심길'로 걷기 시작한다. 길을 따라 고개를 두 번 넘으면 송광사에 도착이다. 총 12km로 이름이 '천년불심길'인 이유는 과거에 스님들이 수행하면서 걸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할 수 있다.

중간에는 조계산 등산객들에게도 인기인 유명 보리밥집도 있어 이 보리밥을 먹기 위해 간다는 말도 돌고 있다. 그 보리밥집은 조계산을 몰랐던 나조차도 지도 앱에 저장해 두었더라. 이쯤 되면 천년불심길 트레킹은 내가 예약한 시점보다도 훨씬 과거에 이미 예정되어있던 미래 아니었을까.

코스 초입을 짧게 표현하자면 '놀라움의 연속'이다. 단풍 숲 중간을 걸었더니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올 것 같은 편백나무 숲이 나타난다. 조계산 안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한 모습들이 숨겨져 있었다. 덕분에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몇 걸음씩 걸을 때마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트레킹의 재미가 이런 거구나! 난생 첫 정식적인 트레킹 첫인상은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혼자 트레킹 종착지까지 가는 것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12km씩이나 되는 길을 혼자 길도 안 잃어버리고 갈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표지판이 헷갈릴만한 지점에는 꼭 있다. 유일하게 헷갈렸던 곳이 보리밥집에서 송광사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걸어온 길에서 빠져나와 보리밥집으로 온 건데 완전 다른 길로 가라 해서 순간 표지판을 불신했다.

모험가가 된 기분을 한껏 느끼다 보면 진짜 트레킹이 시작된다. 조계산 천년불심길 난이도는 여행사 기준으로 중이다. 트레킹 치고 무릎을 부지런히 쓰게 한다. 돌에서 돌로 오르막길을 올라가는데 정말 끝도 없이 오르막길만 있다. 순간 설악산 울산바위라도 가는 줄 알았다. 악몽인데 그거. 평소에 등산을 안 좋아했다면 끝까지 완주 못 했을 것 같다.

유일한 등산 메이트는 단풍뿐이었다. 단풍 트레킹을 신청한 의미가 차고 넘칠 정도로 때로는 빨갛고 때로는 주황빛인 나뭇잎들을 실컷 봤다. 내년 단풍까지 당겨 본 기분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SNS에는 지금도 은행나무 명소가 피드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갈 필요를 못 느끼고 있다. 조계산 천년불심길 트레킹은 단번에 단풍 여행을 끝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듯하다.

천년불심길 트레킹을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맛있는 고개 '보리밥집'이다. 조계산 자체가 보리밥집으로 유명하다. 가이드님께서는 보리밥을 먹기 위해 조계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셨다. 위치 선정도 적절한 게 딱 고개 하나를 넘으면 보리밥집이다. 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점심시간에 도착하기 좋다.

그래서인지 다른 산들과 다르게 조계산을 걷는 동안 도시락을 꺼내는 사람들을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파전도 있지만 거의 단일 메뉴다. 보리밥정식 8,000원

맛에 대한 평은 길게 구구절절 말할 필요가 없다. 너무 먹으면 오히려 남은 고개를 넘는 게 힘들 것 같아 반 공기만 먹으려고 했는데 한 공기를 몽땅 먹어버렸다. 이거면 충분히 설명이 된다.

덧붙인다면 가마솥에서 연기 풀풀 나게 끓고 있는 숭늉을 꼭 맛보고 나오자.

두 번째 고개는 낙엽과의 싸움이다. 올라가는 난이도는 첫 번째 고개만큼 길지 않아 견딜만했는데 낙엽이 첫 번째 고개에 비해 눈에 띄게 많이 길에 깔려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가을 산행의 위험은 대부분 낙엽으로 만들어진다. 마른 낙엽이든 젖은 낙엽이든 등산로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미끄러워 부상을 당하기 딱 좋다. 이 문장들을 쓰는 이유는 '저처럼 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두 번째 고개 정점을 찍고 내려가는 하산 길에 왼쪽 발목을 제대로 접질리면서 한쪽 발이 힘을 잃어 내려오느라 혼이 났다. 안 부러진 게 어딘가 싶다가 도 사일째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오른쪽은 발목을 접질리면서 무릎을 바위에 부딪혀 된통 까졌다(바지도 이때 찢어졌다). 집에 와서 제대로 보니 처참하더라.

산행은 언제나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징징대면서도 사진은 계속 찍었다

두 번째 고개는 등산이 짧고 하산 길이 길다. 다치면서 고비가 왔는지 이제 그만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스님들은 수행을 하면서 걸으셨다고 하는데 이렇게까지 힘들면 수행이 오히려 안 되지 않을까 별별 생각을 다 한 것 같다. 다쳐서 멘탈을 못 잡은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다녀와서 찍은 사진들을 모니터에 띄우니 얼마나 흔치 않은 풍경을 보고 온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징징대며 발을 끌고 온 길은 어디 해외 트레킹 사진에서나 볼 법하다. 사진들을 토대로 다시 회상해보면 천년불심길 트레킹 코스의 진수는 초입과 4/5 지점이다. 코스 양 끝에서 인생 풍경을 선물하는 길이다. 안전한 산행으로 그 소중함을 끝까지 잃지 말자.

가장 신기한 건 생각보다 소요시간이 짧다. 세 시간 반이면 완주가 가능하다. 체감은 분명 반나절이었는데 산속에서 시간이 더디게 간 걸까. 아니면 터널 같았던 그 구간이 정말 다른 세상이었던 아닐까. 너무 다양한 풍경을 봐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잊게 되는 길이다. 이러면 꼭 쉬운 길을 힘들다고 꾀병을 부리는 것 같아져 머쓱한데.

대나무 숲을 마지막으로 선암사부터 12km를 걷는 트레킹 구간은 끝이 난다. 트레킹도 산행도 가장 큰 장점은 '보람'이더라. 이걸 해내다니! 한층 더 성장하는 기분을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다. 뿌듯함을 안고 몇 걸음을 걸으면 사찰의 어느 건물이 나타난다. 송광사다.

선암사와 송광사를 연결 지어 보면 두 사찰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는데 선암사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멋이 있다면 송광사는 선암사보다 화려하고 웅장한 멋이 있다. 건물을 칠한 색의 채도가 높고 선이 많다. 실제로 대웅보전의 채색은 건축학적으로도 관심 가질만한 독특함이 있다고 안내에 쓰여 있었다.

송광사도 큰 사찰이라 구석구석 돌아다닐 곳이 많다. 특히 경내 곳곳에 심어져 있는 나무의 모양새는 꼭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그림 나무 같다. 말 그대로 '그림 같다'.

어느 각도에서 보는 시야든 나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송광사는 뜻밖의 발견이다. 이렇게 멋진 계곡이 완주를 축하해줄지 트레킹 내내 몰랐다. 순천에 이렇게 계곡이 멋진 사찰이 있다니 내적 호들갑을 떨다가 결국 누각에 한참을 앉아 사진도 찍고 일종의 물멍 타임도 가졌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 시간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누각 위에서 시간을 훌쩍 보내 후다닥 가방을 들었다.


여행지 몇 곳을 더 다녀왔다고 해서 순천을 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분명 순천에는 내가 모르는 공간이 훨씬 많다. 그럼에도 이전보다 더 많은 순천을 알게 되어 충분히 의미 있는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집에 와서 '순천에 선암사랑 송광사가 있는데 풍경이 미쳤더라. 나중에 같이 가 보자' 말할 수 있게 됐고, 누군가 단풍 여행지를 물어볼 때 떠올리지도 못했던 조계산을 말할 수 있게 됐으니 내가 아는 세상이 더 넓어졌다고는 말할 수 있게 됐으니까. 발목과 무릎 부상은 영광의 상처라고 하자(물론 다음에는 상처 없이 큰 의미만 얻어오는 걸로).


《송광사에서 일기 전문》

생생함을 남기기 위해 송광사 일주문 앞에서 이른 일기를 쓴다. 1시부터 4시30분까지 큰굴목이재를 따라 긴 트레킹을 완수했다. 등산도 하산도 예상보다 힘들고 하산은 지루한 감도 있어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 되돌아갈 수 없어서 완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하산할 때는 발목을 접지르면서 무릎도 까졌다. 두 발을 다 다치는 영광스런 상처를 획득... 휴 되는 일이 없다고 잠깐 짜증났지만 무사히 발들을 끌고 완주하니 보람은 있다. 게다가 대나무숲을 나와서 뒤로 보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산이 시선을 붙잡는 풍경이라 충분한 보상이 됐다.

송광사와 선암사는 기대보다도 훨씬 예쁘다. 두 사찰은 다른 느낌으로 예쁜데 송광사는 대웅보전부터 웅장하고 처마 색상들이 엄청 디테일하고 여러 색을 썼다. 가을 단풍까지 빨갛게 물들어 색감깡패 사찰이 됐다. 특히 사천왕 앞에서 보는 작은 계곡과 단풍의 조화가 실로 놀랍다. 의도하지 않은 풍경이 어쩜 이리 완벽한지.

선암사는 아기자기하다. 대웅전도 대웅전이라고 하기에 작을 정도로 경내 건축물들이 모두 작은데 전체 규모는 또 큰 사찰이다. 아기자기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린다. 송광사는 단풍 선암사는 은행나무다. 은행잎이 비처럼 내려 바닥에 노란 카펫이 깔렸다. 가을 한정판 카펫이다.

가을 여행은 미련없을 정도로 모든 걸 다 보고 가는 여행이다. 단풍 은행 트레킹(등산일지도) 산세 한옥. 대한민국의 가을을 하루에 다 본 듯해 두발을 잃었지만 후회되지 않는다.

그래도 두번은 조계산 트레킹은 못 하겠다. 사찰들만 또 올래.



▼ 트레킹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별도로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 뚜벅이여행자를 위한 뉴스레터 구독하기


매거진의 이전글 가봤어도 다시 한번, 제주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